결정적 순간

 

                                                                                        김홍근

프랑스 출신의 사진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사진집 『결정적 순간』(1952)은 스냅 사진의 고전이다. 그는 빛과 구도와 감정이 일치된 순간을 기다려 셔터를 누르며, 그 한 장 속에 피사체의 진면목을 담으려 노력해 왔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간디는 브레송의 사진 한 장으로 기억된다. 작은 골방에서 사리만을 걸친 채 물레를 돌리고 있는 모습.

플라톤과 기독교인들을 사로잡아온 ‘영원’이란 개념은 시간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탄생했다. 흐르고 흘러서 결국 바다에 도착하는 강물, 그 시간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아름다운 발명품. 최후의 심판 뒤, 시간의 흐름이 멈추고 영원의 시대가 오면 인간은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될까?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 연옥과 천국을 순례한다. 그곳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영원하기 때문에 인간은 어느 한순간의 모습으로 고정된다. 마치 한 장의 스냅 사진 속의 모습처럼.

과연 최후의 심판과 그 후의 영원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이 개념은 우리에게 인생의 신비를 엿보게 한다. 가까웠던 가족이나 선생님들은 돌아가신 후, 대개 우리의 가슴에 하나의 이미지로 남는다. 그분과 짙은 공감을 나누던 그 은밀한 순간의 모습이 각자의 가슴 속에 ‘영원히’ 깊이 각인되는 것이다. 한 인간에 대한 추억은 그 ‘결정적 순간’에 완성되어, 우리의 삶이 지속하는 한 ‘그대로’ 온전히 보존된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있어 ‘결정적 순간’은 언제일까? 내가 나가 되는 그 순간이 아닐까?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했을 때, 아니면 하나의 인생관이 세워졌을 때, 혹은 내가 나를 만났을 때. 나의 경우 그 ‘결정적 순간’은 20대 후반에 찾아왔다. 대학원 석사 논문을 쓰던 시절이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내가 왜 여기 이렇게 앉아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시적 체험이란 무엇인가?’ 하는 글을 읽다가 실제로 그 체험을 하게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현재’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얼마 뒤 나는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시간 체험’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이런 글을 썼다.

 

“시간의 주름살 속에 숨어 있던 생의 이면과 갑작스럽게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일상의 흐름이 끊기면서, 전혀 낯설고 이질적인 누군가가 나의 의식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지요. 내 속에 잠자고 있던 누군가가 생각의 빛에 잠이 깨어 ‘현재’라는 얇디얇은 시간의 틈을 뚫고 이 세상으로 솟구쳐나온 것입니다. 그때 모든 게 ‘난생 처음’으로 다가왔습니다. 눈에 띄는 모든 게 신비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내 마음 속에 비밀스런 세계, 존재의 치명적인 이질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그 ‘누군가’와 이상한 그러나 숙명적인 동거를 시작했다. 그 동거는 나를 ‘누구나 겪는 삶’에서 ‘나만이 살아내는 삶’으로 거듭나도록 독려했다. 전자가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만을 좇고 사는 삶이라면, 후자는 과거나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를 희생하기를 거부하는 삶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한 가면의 삶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식과 마주서는 치열하고 정직한 삶이다. 이념이나 명분으로 스스로를 구속하는 삶이 아니라 늘 깨어 있고 자유롭고자 하는 삶이다. 물론 나는 무수히 쓰러졌고, 일상의 미로 속을 헤매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날 버리지 않고 가끔씩 ‘결정적 순간’을 되살려주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펜을 드는 것은 나이지만, 그 순간 알 수 없는 바람이 훅 느껴지면서 누군가가 글을 불러주고 나는 받아 적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일상의 무딘 흐름을 거슬러 끊임없이 그 ‘원형의 시간’으로 돌아가려고 애썼고, 그때마다 나는 펜을 들거나 사진기를 들여다보거나 책을 읽었다. 자연히 관심도 인간이 얽혀 사는 사회상보다는 개체적인 각성과 그 표현 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종교와 예술이 순수해지면 그 경계선이 무뎌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힘, 나를 행복하게 하고 구원해 줄 것 같은 힘, 나는 그 힘을 찾아 나름의 순례를 해온 것 같다.

나는 무감각하고 무력증에 빠져 있다고 느낄 때 주문처럼 ‘결정적 순간’을 되뇌어본다. 본질에선 변함이 없지만,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 순간들의 다양한 변주는 아름답다. 인생은 리듬인 것 같기도 하다. 리듬이 고조된다고 느낄 때 나는 ‘들을’ 준비를 하고 펜을 든다.

 

스페인 마드리드 대에서 중남미문학 전공. 문학박사.한국외대, 고려대 강사. 문학평론가. 현 성천문화재단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