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평>

 

 인생은 아름다워라

 

 

                                                                                        김종완

이번 호에 평할 작품을 고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목성균 선생이 살아서 마지막으로 작품을 발표한 지면이 <계간 수필>의 이번 호이고, 그의 작품은 훌륭했다. 그의 작품을 평하고 나면 다시는 어디에서도 그의 신작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남겨진 그와의 마지막 이별 의례인 것이다.

이승이란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한번 지나가는 소풍길이다. 모든 인간의 궁극의 물음이 죽음이었고, 그리하여 세상에 무수한 종교가 발생했다. 어디서 왔느뇨? 분명 어디로부터 비롯되어 왔으나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어디로 가느냐? 분명 가기는 가나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생명이란 바람처럼 비롯되었다가 바람처럼 사그라진다. 내가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죽는 순간까지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사 모든 것을 염려하다가 돌연히 사라지는 걸로 보아서, 저승이란 결코 이승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 이승과 저승은 옷의 속과 겉 같은 것이라는 것이고, 죽었다가 돌연히 살아오는 자가 없는 걸로 보아서 저승은 절대 이승을 살아가는 법도가 아닌 다른 법도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란 확신이다.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만큼만 죽지 않고 살아 있다. 그러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마저 떠나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대의 축복이다. 특히 통증은.

 

김국자의 ‘고려장’

 

고려장’은 치매에 걸린 95세의 시어머님을 요양원에 맡기고 며느리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진솔하게 쓴 글이다. 작가는 진솔함으로써 문학을 얻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시어머니 앞에서 더는 치장해야 할 것도 감추어야 할 것도 없어져버린 거였다. 인생이란 남의 눈을 의식해서 성장(盛裝)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는 자각을 얻은 것이다. 남의 시선을 놓자 그렇게 안 되던 문학이 절로 되었다. 멋을 내기 위해서 문장을 비비꼬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허물을 숨김없이 드러냈을 뿐. 그러자 독자들 또한 결코 작가와 다르지 않다고 자복하더니만 모두가 스스로 공범이 되어 ‘내 탓이로소이다’라고 가슴을 치는 거였다. 감동이란 이런 것이다. 너무나도 많은 수필이 설교를 해왔다. 그런데 ‘고려장’은 드물게 설교하지 않고 참회하는 문학이다. 고려시대의 기로전설(棄老傳說)에 3대가 나오듯 ‘고려장’에도 3대가 나온다.

 

우리 집에는 구십대의 시어머니, 육십대인 나 그리고 삼십대의 손자며느리, 이렇게 삼대가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를 요양소에 모신 일로 어머니에게 불효를 한 것 같아 며느리에게 면이 서지 않는다.

 

글의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지만, 이 3대의 구성은 작가 또한 치매에 걸리면 나의 아들에 의하여 요양원에 보내질 신세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낸 것이 불효일 리 없다. 한국의 실정에서 입원비 문제로 하고 싶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러면 작가는 왜 어머니를 보내고 괴로워하는가.

치매란 별것이 아니다. 인간이 어느 날 갑자기 관계의 끈을 놓아버리고 홀로 세상에 서 있는 것을 말한다. 관계에 의하여 책임져야 할 역할들을 어느 날 갑자기 방기해버린 것이다.

이 사회란 관계와 관계의 다층적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한쪽이 관계의 끈을 놓아버리면 맞은편에서 관계의 한쪽 끝을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황당스러운 일이겠는가. 관계의 한쪽 축이 무너지면 도미노 현상으로 다른 축의 균형에 문제가 생긴다. 누구나 한 개인이 짊어질 수 있는 관계의 최대치를 짊어지고 있다. 난 한 여인의 남편이고, 몇 아이의 아버지고, 부모님의 아들이고, 회사의 직원이고, 한 나라의 국민이고……. 이 얼마나 다층적인가. 그 어느 하나 가벼운 것이 있나? 그 관계성을 놓아버릴 때 그 존재는 이 사회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육되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은 송두리째 상실되고 마는 것이다. 최소한의 존엄성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상대는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잃어버린 저 사육되고 있는 존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졌다는 것에 더는 참을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똥오줌마저 가리지 못하면 사랑했던 사람이 짐승으로까지 퇴화되는 과정을 차마 더는 볼 수 없게 된다.

 

어머니는 이미 몇 년 전 치매로 며느리인 나를 놓아버리셨다. (중략) 보따리를 싸놓고 집에 가겠다고 하지를 않나, 버선발로 대문 밖으로 나간 일도 있었다. 제일 힘든 일은 대소변의 처리 문제였다. 남편이 어머니를 요양소로 모시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이 점이었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올케라 하고 아들을 오라버니라고 하신다. 그러면서도 요양소 옥상에 심어진 각종 화초와 채소들의 이름은 정확히 알아맞힌다. ‘이렇게 가지, 고추, 봉숭아꽃은 알아보면서 왜 사람과의 관계는 잊어버리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어머니는 자기로부터 비롯된 인간과의 관계에서 해방되셨다. 그 순간 어머니는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치고 지금은 다만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어찌 할거나. 정을 떼기가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실은 한 달째 앓고 있는 감기는 핑계인 것이다. 힘이 없고 맥이 빠지고 진땀이 난다. 정신이 멍해지면서 발은 허공을 딛는 것 같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어머니를 안고 끙끙 앓고 있는 것이다.

 

‘고려장’은 문학이 갖추어야 할 첫번째 덕목이 진솔함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진솔함에서 무한한 감동이 우러나왔다. 시어머니는 작가에게 글쓰기의 요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이 또한 부모님의 은혜 아닌가.

 

목성균의 ‘배필(配匹)’

 

목성균이 유명을 달리하면서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가 43년 동안 동고동락한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였다. 그는 그 글에서 절제된,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묘기를 부렸다. ‘배필’에는 두 개의 이야기 축이 있다. 나의 배필과 최전방 해병 중대장의 배필.

그는 최전방, 대안의 북한군의 서치라이트가 훑고 지나가는 오피에 파견 근무하는 위생병이었다. 서해 낙조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아버린 군기 빠진 군인.

 

어느 날 집에서 하서(下書)가 당도했는데, 강원도 귀래라는 곳에 전주 이씨 성을 가진 참한 규수가 있어서 네 배필(配匹)로 생각하고 있으니 그리 알라는 내용이었다. 배필이라는 아버님의 굵직한 필적이 젊은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평생 같이 뛰게 내 옆에 붙여줄 암말 한 필, 나는 저녁식사 후면 돈대에 앉아서 서해 낙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참하단 말씀이시지. 꽃처럼 예쁠까, 암말처럼 튼튼할까.’

 

중대장으로부터 딱한 부탁을 받는다. 아내가 애를 낳았는데 영 기운을 못 차리고 미역국도 못 먹는다며, 의무중대에 가서 링거를 구해다 놓아줄 수 없겠느냐는. 그때 중대장은 지휘관이 아니라 딱한 처지의 남편에 불과해 보여, 선뜻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자대인 의무중대에 내려가 보급계 선임하사관에게 중대장 아내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5프로 한 병을 부탁했다.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가까스로 생리식염수를 두 병 얻었다.

 

중대장은 어느 농가의 문간방을 얻어서 살림을 하고 있었다. 산모가 핼쑥한 얼굴로 누워 있다가 부스스 일어나서 나를 맞이했다. 방 안 가득한 비릿한 냄새. 아기 냄새인지 아기엄마 냄새인지 모르지만 내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배필’을 100% 즐기기 위해서는 목성균 특유의 코드를 미리 입력해 두어야 한다. 하서(下書)가 당도하고, 배필을 정했으니 그리 알라는 아버지의 일방통고가 있고, 그 배필을 상상해 보고, 가서 선을 보고, 군복무 중 장가를 가고, 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상상을 뛰어넘는 상황순종형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인생이 재미없을 거라고? 순종형의 특질은 순종의 대상에 대한 한없는 신뢰와 그 상황에 대한 뛰어난 적응력에 있다. 돈대에 올라 넋 놓고 나의 배필을 상상해 보고, 중대장의 배필을 통해서 나의 배필을 미리 경험해 보고, 여기에 성감을 자극하지 않는 성애적 표현은 친육親肉적 유대감을 한층 북돋워준다. ‘배필’은 친육적 유대감을 빠트리면 헛 읽은 것이다. 성애적 표현에서 성감을 빼버리는 그의 솜씨는 신기하기도 하다.

앞의 인용문에서 냄새를 기억해 두고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보자.

 

나는 중대장 사모님을 눕혀놓고 주사를 놓았다. 왜 그리 떨렸을까. 핏기 없는 하얀 산모의 팔뚝에서 떨리는 손으로 혈관을 찾아 주사바늘을 꽂는 일이 숙달된 위생병의 평소 솜씨와 달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사의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팔이 너무 투명하고 맑아서 그랬을까. (중략)

만약 그때 그녀가 불안하거나 불쾌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였다면 나는 주사 놓기가 오히려 더 수월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면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을 리도 없고, 내가 지킨 약속 또한 그리 소중하게 기억될 리도 없다.

 

작가는 이제 배필이 필요할 만큼 다 자란 말이다. 산실 특유의 냄새 속에서 젊은 여인을 눕혀놓고 팔뚝에 주사를 놓는다. 여인의 팔이 너무 투명하고 맑게만 보인다. 최전방 중대장 사모님이란 상상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지배 권력의 수혜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러면서도 성실하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순진한 우리네 누이이다. 가난하면서도 부자들의 삶을 구경한 적이 없어 가난한 줄 모르는, TV 드라마에서 부자들의 생활상을 보면서 언젠가 내가 누릴 환경을 미리 본다고 착각하는 우리 누이이다. 소녀 적 꿈을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여인이다. 어찌 사랑스럽지 않으리.

 

오전에 한 병, 오후에 한 병 소금물 주사를 맞은 중대장 사모님은 딴사람처럼 생기가 돌았다. 굳이 저녁밥까지 해줘서 먹고 왔다. 나는 밥을 먹고, 중대장 사모님은 미역국을 먹고, 우리는 오누이처럼 겸상을 해서 먹었다. 비릿한 냄새 가득한 산모의 방에서 산모가 해준 밥을 마주 앉아 먹는 황홀한 영광 때문인지 밥맛도 몰랐다.

 

비릿한 냄새가 가득한 산실의 단칸방에서 오누이처럼 겸상해서 밥을 먹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아름답다. 이 장면을 읽으며 내 눈에는 원시의 동굴 속, 모든 일을 단 하나의 공간 속에서 다 해결하는 ‘우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동굴 속에서 이제 막 절정의 하나됨이 끝난 젊고 건강한 부부가 서로 시장기를 느꼈고, 먹을 것이라고는 밥밖에는 없는, 그래서 새로 밥을 지어서 맛있게 먹으면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행복해 하는 모습으로 떠오른다.

 

나는 막 해가 진 바다를 향해서 돈대에 주저앉았다. 흑장미 빛 같은 노을이 해협을 물들이고 있었다. 비로소 손에 든 책 표지를 보았다. 『청록집』이었다. (중략)

중대장 댁을 나오는데 사모님이 따라 나와서 내 손에 쥐어준 책이었다. 손을 잡힌 채 바라본 중대장 사모님의 맑고 투명한 얼굴이 처연하리만치 고왔다. 나는 지금도 산모의 얼굴이 배필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중대장 사모님의 모습에서 나의 배필의 모습을 그려본다. 아름다웠던 시절이다. 생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고, 미래는 가능성만으로 펼쳐져 있다. 그는 특별 휴가를 얻어 예약된 배필과 선을 보았고, 결혼을 했고, 이후 43년을 함께 살다가 세상에 그 배필을 남기고 먼저 갔다.

그는 그의 배필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배필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사실은 중대장 사모님을 그리는 것은 자기 배필의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처음 그렸던 모습으로 배필과 함께 짝지어 43년을 살았던 아름다운 사람.

 

노을을 보면 60년대 초, 강원도 철산리 뒷산 돈대에 앉아 있던 상등 수병이 보인다. 파란만장한 해협을 물들이며 지던 장엄한 노을이 눈에 선하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항상 조건 없이 자기편이었던, 43년을 지치지 않고 함께 달려왔던 자기의 배필에게 사랑의 소야곡을 부르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