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무처럼

 

                                                                                          박이문

나는 똥파리나 지렁이가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요행스럽고 그러한 요행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때로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로, 동물이 아니라 식물로 태어나고, 식물이 아니라 바위로 존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다. 인간보다는 다른 생명체로 태어났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사르트르의 설명대로라면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또한 그만큼 불안을 동반함으로 저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체로 존재하는 것보다는 바위나 돌처럼 그냥 물체로 존재했으면 하는 것은 루마니아 태생의 프랑스의 철학적 에세이스트 E.M. 시오랑의 한 저서의 이름대로 『태어났음의 불편』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이 어딘가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거북하게 느껴진 때가 적지 않다.

시오랑과 같은 사상적 맥락에서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술과 춤의 신 디오니소스의 양부(養父)인 동시에 스승이기도 했던 던 시레니우스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아주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 바람직한 것은 빨리 죽는 것이다”라는 주장에 공감이 갈 때가 있다.

모든 종교는 이 세상을 넘어서 존재하는 초월의 영역에 대한 믿음이거나 욕망의 표현이며, 세상에서의 삶의 고통에 대한 뼈아픈 경험의 산물이다. 힌두교와 불교는 삶의 본질적 고통, ‘공(空)’ 혹은 ‘무(無)’로 불리는 인생의 허망한 무상성의 의식에서 출발한다. 힌두교와 불교와는 달리 인생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도 힌두교나 불교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 니체가 신랄하게 비판했듯이 위와 같은 서양의 종교들은 적어도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불만과 그러한 삶의 가치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한편 실존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을 무의미한 수난’이라고 주장했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부정이 곧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르트르가 주장했던 것처럼 인간의 궁극적 욕망은 인간 존재의 철학적 구조상으로 보아 죽는 것인 동시에 살아 있는 것이다. 인생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삶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삶 자체는 인생에 대한 모든 태도, 소망 속에 이미 전제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식의 삶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냐는 것을 찾아내는 데 있다. 이러한 사실은 힌두교·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과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천당天堂에서의 새로운 양식의 삶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에서도 드러난다.

문제의 답은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죽음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양식을 찾아내는 데 있다. 내 스스로 나의 삶, 나의 살아가는 꼴을 곰곰이 반성해 볼 때 아무리 해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말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사람이고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반성해 볼 때나 아니면 자신의 하나 하나의 모든 언행들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완전히 만족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사정이 이렇게 난처하다면 인간과는 다른 바람직한 존재로 태어날 수는 없을까? 어떤 종류의 존재 방식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양식일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일률적일 수 없다. 그것은 각자의 기호에 따라 달라지고, 각자의 기호는 교육, 자연적 및 사회적 환경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고,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 가치관에 따라 서로 달라질 수 있다. 침착한 성격과 의젓한 몸가짐으로 사는 삶의 모습을 귀하게 여기는 이는 어떤 종류의 생명체보다도 바위처럼 말 없으면서도 당당하고 의젓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싶을 것이며, 반대로 활동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경박하게 보이는 삶을 선호하는 이는 한 번도 안정감을 주지 못하고 항상 무리를 짓고 정신없이 몰려다니는 리카온의 삶의 양식에 마음이 끌릴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육지에 사는 동물보다는 하늘을 높이 그리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의 삶의 양식에 마음이 팔릴 것이다. 권력 지향적이고 권위적인 삶을 지향하는 이는 톰슨 가젤이나 토끼나 사슴보다는 호랑이나 사자를, 토끼나 물고기보다는 하늘을 선회하는 매나 독수리의 삶을 삶의 이상적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가령 미국과 독일 같이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는 국가들이 독수리를 국가의 한 상징물로서 여러 곳 및 행사에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한편으로는 그것의 제국주의적 및 군국주의적 성격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본성의 한 보편적 측면을 인정할 때 그 이유가 충분히 이해된다.

죽어서 자신의 존재 양식을 선택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존재로 재생하기를 원할 것인가? 나는 어떤가?

나는 바위나 돌과 같이 비생명체, 즉 그냥 물질이나 물고기나 새, 동물보다는 풀과 나무와 같이 식물체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한 비생명체가 에메랄드나 다이아몬드 건, 나는 아무리 괴롭더라도 죽어 있음보다는 살아 있음이 아름답고 생생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없는 존재가 인간들에 의해서 아무리 높이 평가되더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동물보다는 식물로 존재하고 싶다. 바위도 좋고, 풀도 좋고, 물고기도 좋고, 날짐승도 좋고, 네 발 달린 야수들도 좋지만, 나는 역시 나무를 더 좋아한다. 동물보다 나무를 더 좋아하는 것은 동물들이 한편으로 풀이나 나뭇잎과 같은 식물들 혹은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동물들의 공격을 피해서 항상 사방을 이리저리 조심스럽게 돌아보면서 도망쳐 다녀야 하는 모습이 체통이 없고 불안정하며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식물, 모든 나무가 한결같이 내가 살고 싶은 존재 양식은 아니다. 내 마음을 가장 끄는 나무는 곡선을 그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겨울에도 푸르게 우뚝 서 있는 한국 고유의 높으면서도 우아한 적송(赤松)이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동안 변하지 않는 푸른 잎을 간직하고, 폭풍이 불든 폭우 폭설이 덮치든 흔들리지 않고 동네 한가운데나 혹은 산기슭에 하늘을 향해서 높이 뻗어 있는 전나무(杉木)가 모두 보기에 좋다. 하지만 나는 적송보다는 전나무가, 적송의 존재 방식보다 전나무의 존재 방식에 더 마음이 끌린다.

 

언제고 변함없이 푸르고, 어떠한 계절의 요란스러운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항상 떠들썩하고 부산스럽게 돌아가는 동네 인간사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에 딱 버티고 당당한 모습으로 우뚝 서서 마을에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묵은 전나무의 자신감과 지조가 한없이 믿음직하다. 하늘로 곧장 높이 뻗어 뛰어나 보이면서도 단순하지만 전체적으로 어디 한 곳에서도 흩어짐 없이 잘 균형잡힌 동네 한복판에 선 전나무의 자세는 황제와 같은 권위로 아주 당당하면서도 극히 겸손하고, 점잖으면서도 고귀한 품위를 갖추고 있다.

인간의 삶이 그 하루 하루가, 아니 그 한 순간 한 순간이 자유와 그것이 동반하는 불안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의식하면 할수록 나는 살아 있으면서 모든 정신적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초연하게 존재하는 전나무 같은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싶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외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성찰해 보면 볼수록 그것은 당당하지도, 아름답지도, 자유롭지도, 건강하지도 그리고 의젓하지도 못하다. 다른 사람들을 보아도 사정은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이런 것을 의식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나는 전나무, 말 없이 우뚝 선 푸른 전나무 같은 인간으로 존재하고 싶다.

 

보스턴 시몬즈대 명예교수. 불문학자. 철학자.저서 『상황과 선택』, 『철학의 여백』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