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의 지혜

 

                                                                                          김병권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에 대한 기사가 온통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다.

여자와 부유층만을 골라 무차별적인 살인행각을 벌인 그는 아직까지 반성이나 회개한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참으로 끔찍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말세 증후군이 심화되고 있는 세태라고는 하지만 자기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선량한 사람을 그렇게까지 참혹하게 살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왜 그랬을까? 아내가 자기를 버리고 떠나갔다고 해서 모든 여성을 어찌 적대시할 수 있으며, 이웃이 자기보다 잘 산다고 해서 어찌 증오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세인들의 푸념 그대로 그는 용서할 수 없는 악마임에 틀림이 없다. 온전한 사람의 이성이나 감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는 심산유곡에서 외톨이로 살다가 악의 병균에 감염된 것은 아니다. 우리와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은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그렇게 이지러졌던 것이다. 세상이 하도 의롭지 못하고, 참되지 못하고, 오직 자기만을 위해 줄달음질치다 보니 잠시도 이웃에 대한 배려나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약고 똑똑하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일은 하지 않는다. 또한 조금도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고질적인 악습에 젖어 있다. 그러다 보니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악이 선이 되고, 비(非)가 시(是)가 되는 가치전도 현상이 보편화되어 온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있다. 사실 현명은 약고 똑똑하다는 것의 대명사가 아니다. 현명이란 오히려 어리석음 속에 깃들어 있음을 현대인들은 모르고 있다.

길모퉁이에서 한 바보 소년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손님들한테서 십 원짜리 동전만 받아서 깡통에 넣고 있었다. 어쩌다가 백 원이나 오백 원짜리 동전을 주어도 그는 끝내 사양하면서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바보 소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매일같이 십 원짜리 동전을 던져주고 지나갔다. 하루는 동네 유지 한 분이 그 소년에게 다가가 조용히 충고를 했다.

“이 녀석아! 기왕에 구걸할 바엔 백 원이나 오백 원짜리 동전을 받으면 더 벌 수 있지 않느냐?”

“아닙니다. 제가 백 원이나 오백 원을 받으면 한두 번만 던져주고 그쳐버리지만, 십 원씩만 받으니 이렇게 매일 저를 보러 오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듣고 있던 그 유지는 무릎을 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 바보에게도 지혜가 있다는 말의 뜻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무욕(無慾)이 대욕(大慾)이라는 선현(先賢)의 깨우침을 그 소년을 통해 새삼스럽게 음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진짜 바보는 나중에야 알아차리지만 현명한 바보(?)는 미리미리 앞일을 예견하고 행한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러고 보면 오늘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제똑똑’으로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헛똑똑’의 바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남을 밀치고 앞으로 나가는 생활에 길들여진 사람은 결국 남을 해치고 자기 욕심만 챙기는 일도 서슴지 않게 된다. 저 흉악범 유영철의 경우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IQ가 142라고 밝힌 것을 보더라도 스스로의 판단으로는 자기가 무척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똑똑한 사람은 먼저 바보가 되는 것을 배운다는 이치를 그는 몰랐던 것이다. 사람은 똑똑한 사람 편에 서기를 좋아하지만, 신(神)은 늘 바보 편을 들어준다는 철리도 그는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세상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바보는 그 마음이 맑아서 신의 축복을 받는다는 천애(天愛)의 고사도 몰랐던 것이다. 만약 그가 지니고 있는 명석한 두뇌와 예술적 재능을 숙련하기 위해 묵묵히 바보처럼 정진했더라면 저런 비운의 주인공은 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성서에 보면 백 마리의 양을 치는 사람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그대로 둔 채 찾아 나선다는 말이 나온다. 이치상으로 따진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 모두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의 참뜻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기쁨’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이라는 것을 역설한 말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렇게 귀하고 값진 것을 잃어버리고도 아쉬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있다. 무조건 새로운 것만 찾아 앞만 보고 달려 나간다. 선조들이 물려준 찬란한 역사와 주옥보다 더 귀한 명심훈(明心訓)들이 수없이 있건만 그것들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이익만 탐하는 자는 반드시 화를 입게 된다’는 탐리필화(貪利必禍)의 교훈이 있다. 또한 ‘얻기를 탐하는 자는 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옥을 취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후작에 봉해지고서도 공작을 받지 못한 것을 원망한다’는 말도 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늘 마음에 새기고 계훈(戒訓)으로 삼았던들 오늘날처럼 욕심 때문에 빚어지는 온갖 불행은 미연에 예방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마음을 밝힌다는 명심(明心)은 바로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는 뜻이다. 깨끗한 마음이 아니고서는 깨끗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금金으로 만든 잔(盞)이라도 거기에 오물이 묻은 채로 물을 담아준다면 아무도 그 물은 마시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유리잔이라 하더라도 깨끗하기만 하면 뭇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그릇이 될 것이다.

진정으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현명해지려면 오히려 바보들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