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邂逅)의 순간을 생각하며

 

                                                                                       이태동

우리가 힘겨운 생의 여정(旅程)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고통스럽지만 애틋하게 느껴지는 아쉬운 감정은 잃어버렸던 그 누구와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해후(邂逅)의 순간에서 온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들 모두 ‘자기 앞의 생(生)’을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만나 함께 정을 나누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그러나 해후(邂逅)는 서로 만나 깊은 정을 나누었으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나 넘을 수 없는 벽 때문에 이별을 하지만, ‘만남은 이별을 낳고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약속’하듯,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숱한 기다림 속에서 낯설지만 친숙한 얼굴을 다시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가 그리워하면서도 부딪치는 삶의 파도에 떠밀려 배반 아닌 배반으로 헤어져 수많은 세월 동안 가슴에 묻고 있던 잃어버린 사람을 거리에서나 혹은 어느 유리벽 찻집에서 만나게 되면, 그 고마움이야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그러나 ‘해후’가 가져다주는 찰나적인 놀라움 속에 느껴지는 순수한 만남의 환희가 해질녘의 찬란한 황혼 빛처럼 사라지고 나면, 서로의 변한 모습에 절망하게 된다. 어딘가 낯선 장소에서 서로가 마주 앉아 다가선 모습에 눈을 주었을 때 발견한 어두운 낯설음이 세월의 파도가 스쳐간 자국이든지 아니면 홍진(紅塵)이 묻은 상처이든지 간에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물처럼 흘러간 시간의 간격이 가져온 변화의 아픔이다. 그래서 “옛 애인을 만나지 말아야 한다. 만나면 그 모습은 누더기와 같다”는 옛말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프루스트도 이와 유사한 감미롭고 쓰라린 경험을 어느 산문(散文)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몸이 약하고 상상력이 지극히 조숙한 열 살 되는 소년을 안다. 그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소녀에게 순진한 사랑을 바쳤다. 그는 그 소녀가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언제나 창가에 서 있었다. 그는 그 소녀를 보지 못하면 울고, 보면 또 봤대서 울었다. 그가 그 소녀 곁에서 지내는 순간은 지극히 드물고 지극히 짧았다. 그런데 그는 침식(寢食)을 잊어버린 어느 날 창에서 몸을 던졌다. 사람들은 처음 그가 죽은 것은 소녀에게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을 절망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반대로 그가 죽은 것은 그 소녀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뒤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소녀는 그에게 지극히 친절히 대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상상했다. 그는 이러한 도취를 다시 거듭할 기회가 없을 것을 생각하고 삭막한 여생(餘生)을 버린 것이라고. 그러나 그가 그의 동무에게 때때로 고백한 바로 미루어 보면, 그는 소위 그 꿈의 여왕(女王)을 만날 때마다 일종의 기만을 느꼈다고 생각이 된다.'

 

물론 어느 누구든지 다시 만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었지만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 지나간 시간의 괴리가 가져온 상처 때문에 절망한다. 그러나 그 절망의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도 그리웠던 그 얼굴을 외면하게 되거나 그로부터 도망치게 되면, 그것은 그의 삶을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능동적인 참된 삶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움으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시간의 연속이 아닐까.

너무나 오랫동안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있는 순수한 사랑과 우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서로가 만난 얼굴이 아무리 변했더라도, 과거의 아름다운 모습보다 시간의 힘에 외상(外傷) 입은 모습에 애정의 눈길을 주어야만 한다. 눈을 뜨고 바라보는 순간 그리워했던 사람의 일그러진 모습 아래 순수한 옛 모습의 그림자가 조용히 숨을 쉬며 잠을 깨고 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민족시인 예이츠는 결코 맺을 수 없었던 그의 애인, 모드 곤의 ‘변한 얼굴의 슬픔’을 사랑하며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그대 늙어서 머리 희어지고 잠이 많아져

난로 옆에서 꾸벅일 때, 이 책을 꺼내서 천천히 읽으라

그리고 한때 그대의 눈이 지녔던 부드러운 눈매와

깊은 그늘을 꿈꾸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대의 기쁨에 찬

우아한 순간들을 사랑했으며

거짓된 혹은 참된 사랑으로 그대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는지를

그러나 단 한 사람 그대의 순례(巡禮)하는 영혼을 사랑했고

그대 변한 얼굴의 슬픔을 사랑했음을.

                                                      ─ W.B. 예이츠의 ‘그대 늙거든’ 일부

 

별리(別離)의 슬픔을 나눈 사람들이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 신의 축복으로 잃어버렸던 사람을 만나서 너무나 ‘변한 얼굴의 슬픔’을 이렇게 사랑하게 되면,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그는 시간의 바다 속에 묻혀서 ‘바다 작용에 의한 변화를 겪고’도 환경의 변화에 정복당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진주(眞珠)가 된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이별 끝에 이루어진 해후(邂逅)의 순간, 그 찰나적인 기쁨 뒤에 절망이 찾아오면 어디론가 어둠 속 빗길을 자동차로라도 타고 함께 달려보라. 운전을 하며 달리는 차 속에서는 서로가 얼굴을 바라볼 수 없기에 소낙비가 차창을 때리며 흘러내리는 것만 보게 되고, 옆에서 가랑비처럼 찾아오는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잃어버린 옛 목소리를 가까이에서 다시 듣게 될 것이다. 실로 그것은 오랜 세월의 바다 속에 깊숙이 묻혀 있다 해변으로 밀려온 성숙한 사랑의 진주와도 같은 것이다.

 

서강대 문과대학장 역임. 서강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수필집 『마음의 섬』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