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할아버지

                                              

                                                                                      신현복

지난 봄, 외할아버지께서 101번째 생신을 지내셨다.

 

칠남매의 맏이인 내가 구남매의 여덟 번째인 남편과 결혼할 무렵, 나의 부모님은 사십대의 젊은 나이였지만 남편의 부모님은 칠십줄에 들어선, 나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나 다름없는 나이였다. 양가의 친척들이 모인 약혼식 자리에서 외할아버지는 시아버님과 동갑인 것을 아시고는 손을 마주잡으며 반가워하셨고, 나의 친할머니는 시어머님과 동갑이어서 서로 인연이라고 기뻐하셨는데……. 약혼식 때 양가 어른들의 기뻐하시던 모습들이 엊그제 일처럼 눈에 선한데, 연로하신 시어머님을 나도 모르게 ‘할머니’라고 하던 그때의 철없던 이십대의 새댁이 오십을 훌쩍 넘어섰듯 삼십 년의 세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입버릇처럼 “너무 오래 살아서 걱정이다” 하시던 시아버님은 병치레 한 번 않으시고 생전의 깨끗한 모습을 그대로 지닌 채 84년의 생을 마쳤고, 십 년 동안 홀로 사랑방을 지키시던 시어머님은 90을 넘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오랫동안 치매로 주위의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보며, 밤에 자는 듯이 가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하시던 친할머니는 체한 것 같다고 병원에 다녀와서 일찍 잠자리에 드셨는데, 아버지께서 방에 들어가 보니 이미 숨을 거두신 뒤였다고 한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나를 시집보낸 어머니는 77세의 삶도 채 못살고 작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 나이가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결코 많은 나이도 아닌, 주위의 어른들은 모두 당연한 듯이 80을 다 넘기고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는 몹쓸 병으로 여전히 고운 모습을 지닌 채 생을 마친 것이다. 100세를 넘기신 외할아버지는 아직도 저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계신데 말이다.

작년 봄 생신 모임에서 먼저 간 친구 목사들이 꿈에 자꾸 나타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우리는 말은 안 했지만 어머니의 병이 더 악화되기 전에 외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항암주사 후유증으로 가발을 쓰고 살이 많이 빠져서 헐렁해진 옷을 입은 어머니는 친정식구들과의 마지막 모임일지도 모르는 가족사진을 할아버지 옆에서 예쁘게 웃으며 찍고 있었는데, 나는 눈물을 삼키며 어머니의 애처로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할아버지는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혈압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 이모부 걱정만 하고, 어머니의 병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그 몇 달 전, 어머니의 병을 처음 알고 입원을 해서 병문안을 오셨을 때도 당신 몸이 탈장이 되어서 불편하다는 말씀만 하시더니, 기도를 하고 병실 문을 나서며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생명하고 나의 생명하고 맞바꾸자……”고.

할아버지는 그때 이미 어머니가 얼마 못살 거라는 것을 아신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당신이 제일 귀히 여기시는 맏딸의 병에 대해 한 번도 내색을 하지 않고 그렇게 태연하셨던 것일까. 항암주사를 맞으며 힘들어 하는 중에도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안부전화를 자주 했었다는데, 부녀간의 정이 유난히 애틋하신 두 분이 서로 무슨 말씀을 나눈 것일까.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온 그 날 오후, 아버지께서는 서재로 들어가셔서 외할아버지께 전화를 하셨다. 우리는 너무 놀라서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려고 저러시나 하고 모두 문 앞에서 귀를 기울이는데, “아버님, 저희는 잘 있습니다……. 네, 별일 없습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서재에서 나오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우리는 차마 뵐 수가 없었다. 별일 없이 다 잘 있다고 전화했는데, 당신 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말씀은 왜 안 하신 것일까. 그 후 할아버지는 한 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고, 가끔 아버지가 안부전화를 드려도 어머니에 관한 말씀은 일체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지난 봄 생신 모임에서는 느닷없이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미국 가서 왜 이렇게 오래 있느냐고 하셨다고 한다. 가족 중 누구도 어머니 얘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할아버지는 귀히 여기던 당신의 딸이 먼저 저세상으로 갔음을, 기도하면서 은연중에 알게 된 것은 아닐까. 자식을 먼저 보낸 애석함과 민망함을 할아버지는 어떻게 달래셨을지. 뭇사람들이 그러하듯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이런 일을 겪는구나…” 하며 차라리 통곡이라도 했더라면 우리 마음이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어머니가 이 세상에 안 계심에 대한 슬픔보다 우리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은 할아버지의 그런 모습인 것이다.

 

음력설이 지나고 곧이어 외할아버지 생신이 되면 서울에 있는 우리를 데리고 친정 나들이를 하는 것이 대구에 계신 어머니에게는 큰 연중행사였고, 즐거움이었다. 그럴 때마다 외할아버지는 “왜 설에 세배하러 안 왔느냐” 하시며 음식점 카펫 위에서도 우리의 세배를 받으셨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남편과 나의 이름 그리고 두 아이의 이름이 한문으로 각각 큼직하게 쓰인 네 개의 봉투를 세뱃돈으로 주시곤 했는데, 작년에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함께 갔을 때도 세뱃돈 봉투를 받았지만 내 마음은 예전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이었으면 하고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외할아버지를 왕할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와 나이보다 이삼십 년은 젊어보여서 만년청년 같으신 왕할아버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2남 2녀와 그 가족들이 다 함께 모였을 때 행복해 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 당신의 제일 큰 외손녀인 나를 비롯하여 증손주인 갓난쟁이까지 형제끼리, 자매끼리 또는 사촌끼리, 서로 떨어져 살다가 반갑게 만날 수 있는 날이 외할아버지의 생신날이었다.

반갑게 만나서 나누는 재미있는 얘기 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갓난아이의 칭얼대는 울음소리조차 흐뭇해하시며 모두의 안부를 잊지 않고 챙기시고, 가족사진을 찍을라치면 주인공인 당신이 손수 앞에 나가서 청년 같은 목소리로 그 많은 가족들의 배치를 직접 진두지휘를 하시던, 왕할아버지의 지나간 생신날의 풍경이다.

그런 할아버지가 이제는 말씀을 거의 안하시며 지내신다고 한다.오십을 넘어선 내가 삼십 년 전 약혼식 때 어른들의 모습이 엊그제 일처럼 눈에 선하듯, 할아버지에게도 백 년이란 세월이 어쩌면 어제 일처럼 또는 속절없이 그렇게 흘러간 것은 아닐는지. 그래서 아직도 내가 놓친 세월을 돌아보며 아쉬워하듯 할아버지도 가물거리는 지난 세월을 붙들고 있지는 않는지…….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이번 101번째 왕할아버지의 생신날 나는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신데 이제는 외할아버지를 뵙고 싶지 않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