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만의 해후

 

                                                                                              심규호

신혼 시절 가끔씩 무심결에 아내 보고 동생 이름인 규숙이라고 불러 투덜거림을 들을 때가 적지 않았다. 물론 예전 애인 이름이 아닌 이상 겁날 리 없었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되풀이되니 신부인 아내가 눈을 흘겨보고 투덜대는 것도 당연했다. 장가를 간 후에도 여전히 여동생 이름을 자꾸 불러 실수를 연발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우리 집 막내이자 유일한 여동생인 그녀에게 각별하게 애정을 보여준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아내는 동생들에게 언제나 무뚝뚝한 얼굴로 대하는 것을 보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생각해 보니 어디 동생들뿐 만이랴! 그렇다면 어떤 자존심이 나를 그렇게 무뚝뚝하고 인정머리 없는 인간으로 만들었을까?

오빠 둘이 우여곡절을 겪고 대학에 들어간 것에 비해 작은 키에 동글동글한 얼굴로 매사에 꼼꼼했던 규숙이는 어느 날 문득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나는 항상 그것이 대견스럽고 고마울 뿐이었다. 비록 매번 등록금을 내야 할 때마다 은행 창구에서 융자금을 받느라 그녀에게 짜증을 낸 적도 적지 않았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다니던 대학에 들어온 규숙이는 당시만 해도 이른바 문제 서클(지금은 동아리라고 부르지만)인 노래패에 들어가 밤늦게 들어오거나, 당시 불온서적이라고 칭해지던 책들을 탐닉하기도 했다. 나 역시 탈춤반 출신이라 그 정황을 모르는 바 아니나 하필이면 온건한 서클을 모두 놔두고 그곳에 들어가 저리 애쓰나 걱정이 들기도 했다. 내 경험상 한 번 얼이 빠지면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 분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가 자랑스러웠던 것은 여전히 어린 여학생인 줄만 알았는데, 그래도 이 사회와 민족에 대해 나름으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는 어렸을 적 남탕에 데리고 다니던 그 꼬맹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규숙이를 내 나이 9세 때 처음 보았다. 포동포동 살이 오른 계집아이는 사내아이 둘만 있던 우리 집에 큰 행복이었을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규숙이가 태어나기 바로 전에 월남 땅으로 돈벌러 나가셨기 때문에 그 애의 얼굴도 못 보셨는데, 그것은 다시 말해 규숙이가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컸다는 말도 된다. 아버지가 돌아오신 것은 한참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 규숙이는 언제부터인가 내가 아버지 이야기만 꺼내면 펄쩍 뛰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때 규숙이는 난데없이 유학을 가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눈이 펄펄 내리는 어느 겨울 내가 있는 제주로 내려와 며칠 묵었다. 아쉽고 안타깝기만 한 심정만 기억날 뿐 당시 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해해 웃기도 하고, 위장이 아프다고 끙끙대기도 하다가 몇 장의 사진만 남기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녀는 새언니인 아내에게 지금 자신의 상황이 어떠한지, 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려고 하는지 시시콜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콧등이 시큰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마지막으로 그 애를 떠나보내는 날 김포공항, 그깟 미국이야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 아니냐고,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웃는 낯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돌아서며 결국 눈물을 보인 것은 짧은 이별이 아쉬웠기 때문이라기보다 큰오빠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자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색하게도 존댓말로 쓰인 편지가 미국에서 날아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두세 달이 지난 뒤였다. 다행히 미국엔 이모를 비롯한 친척들이 있어 위안이 되기는 했지만, 직접 경험치 못한 이국생활의 어려움을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언젠가 더 이상 굴러가기 힘들게 된 자동차를 바꿔야 한다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을 때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보내며 장문의 편지를 곁들여 가능한 한 빨리 되돌아오길 강요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놀라 어쩌지 못하는 나에게 이모는 그나마 다행으로 크게 다친 것은 아니라고, 병원비 등은 보험에서 처리될 것이라고 전화로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이후 어찌 된 일인지 재판에서 졌다는 소식도 들리고, 보상금은커녕 병원비도 겨우 냈다는 이야기가 전해 왔다. 나는 그제야 미국이란 나라가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으며, 결코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호텔 경영학 공부를 끝내고 제법 큰 호텔에 취업한 그 아이의 편지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 것은 서른을 훌쩍 넘긴 이후의 일이었다. 때로 팩스로 날아오는 그 애의 편지에 누군가에게 한국으로 팩스를 보내줄 것을 부탁하는 글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영 낯설기 만한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에드윈, 아멀하니언. 발음하기도 어려운 그 이름을 듣고 그냥 친구이려니 생각한 것은 안 사람 말대로 내가 여전히 보수적이고 구태의연한 인물이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규숙이가 그와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편지를 보내왔을 때도 사실 나는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이란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 인이라는 이야기에 도대체 아르메니아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인지 궁금했고, 내심으로 그나마 양키가 아닌 것이 다행이지라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동생이 외국인하고 결혼한다는 사실을 화제로 꺼내놓았던 것은 어쩌면 내 스스로 그녀의 결혼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한 수순이었던 같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여동생에서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가 될 규숙이는 이제 더 이상 그 애이거나 막내가 아니라 그녀가 되었으며, 그녀의 선택으로 결정한 결혼에 대해 내가 반대할 이유도 없거니와 반대할 수도 없다는 것을 서서히 실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급진전하여 부모님의 동의 하에 결혼이 성사되자 이젠 결혼식 참가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당시 우리 집안은 영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결혼식에 참석도 못하고, 인터넷으로 중계되는 그녀의 결혼식을 구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 오빠의 몫조차 제대로 행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면서.

작년에 중국에 방문교수로 나갈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미국에 들르기로 마음먹고 떠나기 전에 미국 비자를 받았다. 중국에서 이것저것 선물도 준비하고, 떠날 날짜만 확정하면 되는데, 어떤 연유인지 비행기표를 사는 것도 쉽지 않았고, 여권을 잃어버린 줄 알고 있다가 서랍 구석에서 다시 찾기도 했으며, 심지어 떠나는 날 공항에 늦게 도착하여 아예 못갈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에 있을 때 전화를 걸어 ‘오빠 꼭 오는 거지’라며 몇 번이고 당부를 했던 그녀에게 했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낯선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우릴 만난 규숙이는 자신의 두 아이와 그리고 먼저 가 계셨던 어머니와 함께 우리 4식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오빠, 오빠, 아! 언니, 언니, 언니, 아! 애들아! 규숙이는 이렇게 소리치고, 우리도 덩달아 소리치며 얼굴을 부비고 꼭 껴안고 그리고 그녀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세 살짜리 조카 안드레아스의 말, “좋다, 많이.”

며칠 간 로스앤젤레스에서 머물면서 그녀는 두 집 식구를 모두 데리고 이곳저곳 신나게 돌아다녔다. ‘딩가, 딩가’ 그녀의 새로운 노랫소리 겸 추임새를 듣게 된 것도 그때였다. 딩가 딩가! 무슨 뜻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딩가 딩가’와 ‘좋다 많이’ 그리고 어떤 부탁이든지 즐겨 받아들이는 그녀의 남편 에드윈의 ‘오키도키(okey-dokey:오케이의 속어)’를 들으면서 우리도 덩달아 ‘딩가 딩가’ 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살고 있는 라스베이거스로 온 후로도 계속해서 우리는 처음 만나 어느 결에 피붙이임을 절로 확인하게 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신나고 기쁘고 즐거웠다. 그리고 어느새 3주가 지나고 떠나기 마지막 날, 새로 피기 시작한 담배 때문에 차고로 쫓겨난 나와 에드윈은 평소와 달리 아카데믹하고 폴리티컬한 문제(?)는 놔두고 규숙이를 화제로 삼아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결혼 초기에 사업이 잘 되지 않아 아내인 규숙이가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우리 집안 식구들이 에드윈과 그의 식구에 대해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리고 서로 헤어진 후 많이 보고 싶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세 번째 담뱃불을 껐다.

이튿날 새벽 4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는 우리 식구를 배웅하기 위해 그녀 식구는 물론이고, 그녀의 시아버지와 시아주머니까지 모두 나와 아쉬움을 전했다. 2층 탑승구로 향하면서 우리는 조만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지막 헤어질 때 끝까지 슬픈 내색 한 번 내비치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 연락해. 또 만나! 눈물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에 ‘딩가 딩가’ 노래 부르던 그녀의 모습이 겹치고 있었다. 그래, 오키도키! 잘 살자! 더욱 씩씩하고 튼튼하게!

8년만의 해후는 이렇게 끝났다.

글을 다 쓴 후 먼저 그녀에게 이 글을 보냈다. 오빠가 이 글을 공개해도 되겠느냐고. 곧 연락이 왔다.

“오빠, 남들은 돈 주고 대신 자기에 관한 글을 써 달라고 하잖아. 그런데 오빠가 공짜로 나에 관한 글을 써준다는데 마다할 것이 뭐 있어!”

어느새 씩씩한 아줌마가 된 그녀가 새삼 그리웠다.

 

<계간 수필>로 등단(99년). 제주 포럼 대표.제주산업정보대학교 중어과 교수. 현재 중국 양주대학 방문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