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병 주세요

 

                                                                                           이미연

유월의 토요일 오후, 우리는 명동에 있는 한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도로 위에는 바뀌는 버스 노선을 위해 그어놓은 붉은색 줄이 선명했다. 내가 걸어가는 지하도와 골목길은 많이 바뀌어 낯설었고 흡사 미로처럼 보였다. 결국 약속 시간을 조금 넘겨 도착했다.

이름이 ‘프로방스’인 이 식당에서는 중국 음식과 이탈리아 음식 둘 다 먹을 수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팝 오페라의 여왕인 사라 브라이트만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곳은 인테리어, 메뉴, 음악까지도 모두 여러 가지 종류를 섞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든 식당이었다. 실내는 큼직한 조화로 만든 꽃들을 꽂은 토기 항아리들로 장식했고, 벽은 옅은 핑크색이었다. 우리는 이탈리아 코스 요리를 먹기로 했다. 더불어 마실 것은 맥주를 시키기로 정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메뉴보다는 와인 리스트가 있는 페이지에 눈길을 보냈다.

나는 얼마 전부터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이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생겨 와인에 대한 상식을 배우고 있다. 와인은 식전 음료도 있고, 디저트 대신 마시는 달콤한 와인도 따로 있다. 또한 과일 향과 허브 향을 구별해서 느끼고, 단맛과 신맛의 조합이 술마다 다르며, 보관 온도와 마실 때 온도를 잘 맞추는 것이 와인을 음미하는 데 중요하다고 했다. 식탁 위 와인 잔은 두세 개가 일반적이나 손님을 극진히 접대하고 싶으면 여덟 개까지 준비할 수도 있다고 했다. 와인 시간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미국, 칠레 순서대로 나라마다 생산되는 와인들을 시음했다. 그 와인의 맛을 기억하고, 각 나라별 언어로 된 이름들을 외웠다. 각 나라말로 쓴 와인 리스트를 보니 여고 시절 생각이 났다. 친구랑 나는 알고 있는 영화배우 이름을 적기로 했는데, 대부분 외국인이라 발음도 생소한 배우들 이름을 정말 많이도 적었었다. 둘이서 쓰고 보니, 커다란 칠판을 빈틈없이 메웠다. 지금은 억지로 기억하려 해도 몇 명을 제외하고 잘 생각나지 않았다. 열심히 읽고 있는 와인 리스트도 언젠가 기억 속에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와인은 술이 아니라 이미지에 가깝고, 그래서 와인 마시기는 각박하고 힘든 삶을 이탈하는 방법으로 사용된다”고 한 사회학자는 말한다. 그래서인가 아니면 유행이어서인가 식사에 준비된 와인을 마시는 경우가 요즈음 늘어간다. 마시다 보니 좋은 자리에서 식사 하노라면 적당한 와인 한 잔 마시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유행에 민감하거나 이미지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와인은 영화와 닮은 듯싶다.

쉽게 변하지 않을 듯싶었던 우리의 의식주(衣食住)는 엄청난 변화를 거듭했다. 누군가는 그 변화를 재빨리 따라갈 수도 있고, 아니면 조금 천천히 따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한창 유행중인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 배우들처럼 저절로 퇴장할 때가 올 것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오십 보, 백 보를 달린 병사들처럼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것 같아도 다 같은 입장일지도 모른다.

지난해 호기심으로 아파트 인테리어 강좌를 들었었다. “요즘을 대표하는 인테리어 스타일은 무엇일까요?” 시간이 끝나갈 무렵 인테리어 전문가가 청중에게 질문을 던졌다. 모더니즘이요, 내추럴이요, 엔틱이요, 청중은 알고 있는 모든 단어를 다 동원해 대답했다. 그러나 정답은 ‘믹스 앤 매취(Mix And Match)’라고 했다. 의외로 간단하고 단순했다. 이해를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요즘은 한 가지만 고집하지 않아요. 점심에 무얼 드셨어요? 된장찌개랑 밥을 먹고 후식으로는 카페라떼나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경우가 흔하잖아요. 우리는 인테리어에서 편리를 위해서는 모더니즘을 사용하고, 우아함을 위해서는 엔틱 가구를 쓰고, 건강을 위해서는 목재나 섬유를 사용하는 내추럴을 사용해요. 좋은 장점을 모아서 쓰는 경향이지요.”

문제에 답은 하나라고 생각해 왔던 많은 이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사람들은 일일이 자신의 행동을 분석하지 않을 뿐이지 나름대로 삶의 방식인 스타일이 있음을 느꼈다. 내 스타일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어릴 적에는 외국 영화를 보았고, 중년에는 젊은 세대의 취향을 따라가는 것을 즐겼던 적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들은 온전히 내 것일 수 없었다. 이즈음 나는 어떤 것들은 새로운 유행을 쫓아가고, 또 어떤 것들은 옛것을 쫓아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이 나만의 스타일일 것이다. 내가 선택한 여러 가지를 모아 나만의 비율로 조합한 향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더운 여름, 세상의 변화의 속도를 따라 가느라 힘들어 땀으로 범벅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상큼한 풀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자연을 시원하게 담아내고 싶다. 어디 이 모든 걸 다 담아 숙성시킨 와인은 없을까?

 

<계간 수필>로 천료(99년). 그레이스 수필문우회 회원.

공저 『단감찾기』『창으로 바라보는 풍경화』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