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임홍순

호숫가 숲 속의 미루나무, 덩그렇게 비어 있는 저 까치집에는 언제 임자가 찾아올 것인지 보기에 참 안쓰럽다. 봄이 오면 임자가 찾아오겠지 하고 산책의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다려 왔던 것인데, 그 이후로 감감 소식이다.

사람이 사는 집에도 흉가라는 것이 있듯, 그 둥지에 살았던 까치들이 무슨 변고라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으로 보아 그렇게 빈 둥지로 묵히기에는 매우 아까운 생각이 든다. 어쩌면 자신들이 낳은 알이나 새끼들이 독수리에게 채였거나 아니면 부부싸움으로 해서 서로 갈라섰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사람으로 치자면 복덕방에 매물로 내놓으면 제 값을 톡톡히 받을 수 있을 것인데…, 어찌 되었건 이 까치들은 모두 무주택은 면하고 사는 것이 되고 있으니 그 팔자 하나는 잘 타고난 듯싶다.

빈 까치집이 보기에 언짢게 생각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둥지의 임자였던 까치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 우러나온 관점에서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되고 있는 나의 솔직한 양심인지도 모른다. 나무숲에 홀로 있는 저 까치집은 오히려 빈 둥지로 있기에 나의 심성을 깨끗이 비워주고 있으며, 순수하게 정화시켜주는 카타르시스 역할을 한다. 그래서 비어 있는 저 까치집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고고(孤高)한 외로움에서 오는 허심탄회, 마음 속 깊은 성찰, 그것에서 세상을 사는 자신을 본다. 그래서 그 까치집은 내 마음 속의 사유(思惟)이자 세상을 관조하는 조감도(鳥瞰圖)다. 숲이 보이고 호수가 보이고 마을이 보이고 거기서 사는 사람들이 보이는, 그런 세상 구경을 그 까치집에서 한다.

그 고장을 지나 저만치 떨어진 곳을 가면 여기는 또 까치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참나무, 미루나무, 소나무를 가리지 않고 숲 속에 여러 둥지가 이웃하고 살고 있다. 까치집 대단지 부락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 아래위 층을 흉내내고 있음인지, 한 나무의 아래위,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산다. 어쩌면 이들은 대가족제도를 도입, 부모 형제자매들이 모여 오순도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저 멀지 않은 이웃끼리 사는 둥지도 있다. 멀리 떨어져 홀로 있는 둥지는 고독을 즐기려 함인가. 높은 나무 꼭대기에 지은 둥지는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듯, 아니면 매사에 의심이 많은 것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키 작은 나무에 야트막하게 잇는 집은 모든 것을 까뒤집어 놓고 둥지 속을 활짝 오픈해 보이면서 이웃을 믿고, 사람조차도 믿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까치들도 다른 새들처럼 늦은 봄에서 이른 여름에 걸쳐 한창 집을 짓는 듯싶다. 아직 철이 아닌데 벌써 나무 위 한 모퉁이에 집을 짓느라 잔가지를 입에 물고 부부가 연신 들락날락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집을 늦게 짓는다든지 해서 잘못하면 뱃속의 알을 미처 둥지 속에 낳지도 못한 채, 땅 위에 떨어뜨리게 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한 유산(流産)의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려 더욱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일 게다.

까치는 자고로 사람과 친숙한 길조(吉鳥)다. 사람을 만나면 무슨 사연인지를 쉴새없이 재잘거린다. 반가운 소식을 미리 전해주는 전령(傳令) 구실을 하고, 은혜를 아는 의리 있는 새로 알려져 있다. 사랑방에서 늦잠 자는 나그네에게 낭패가 되지 않게 일어날 수 있도록 방 앞뜰에서 시끄럽게 지저귀어 깨워주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날 노래 속 가사에 이 까치를 불러들여 즐거움을 함께 나눈다.

고향 언덕의 느티나무에 있는 둥지는 아마도 대대로 이어지는 까치들의 종갓집에 틀림없다. 언덕 아래의 들일이 있을 때마다 이 까치 일족은 자신들의 일처럼 일꾼을 환영하듯 재잘거린다. 고수레로 던져주는 음식을 연신 부화된 새끼들이 있는 둥지로 물어 나르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까치는 아마도 일부일처제인 듯싶다. 그리고 원앙이나 잉꼬처럼 금실이 좋은 새임을 겉으로만 보아도 대번에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새가 있는 자리에는 반드시 암수 쌍으로 있는 것만 보아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가끔 메뚜기 같은 곤충을 입에 물고 와 상대방에게 상납하고 구애하면서 사랑을 확인하는 광경도 본다. 이때 상대방이 받아먹기를 거절하면 둘 사이에 금이 가 있다는 증거다.

이 까치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헤어져 살기도 할 것이다. 사람이 이혼하는 것처럼 이 까치들이라고 해서 두 마리가 한결같이 백년해로를 하며 산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호숫가 그 폐가가 되고 있는 둥지는 어쩌면 그러한 불행이 가져다 준 부산물인지도 모르겠다. 같이 살던 까치 한 마리가 혼외정사(婚外情事) 하는 것을 참다못해 가출하고 집안이 온통 풍비박산이 나, 그 길로 빈 집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월악산 기슭 P선생 댁 별장의 감나무 숲에 사는 까치는 복을 많이 타고난 까치들이다. 사방에 주체못할 정도로 붉게 물든 홍시가 지천이다. 그곳을 찾을 때마다 반갑다고 지저귀면서 환영해 주곤 한다. 먼 산을 바라보면서 틈만 있으면 곧 날아가 버릴 듯한 암까치를 다독거려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 광경도 본다. 그때 수놈 까치의 재잘거리며 달래는 소리는 필경, 사방에 지천인 홍시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쌀, 저것도 쌀인데 어디를 가려고 하느냐?”고 타이르는 소리였을 것이다.

산에 사는 까치와 도심지 가깝게 사는 까치는 외양부터 다르다. 산까치는 방금 세탁을 한 옷을 입은 듯, 흑백 무채색(無彩色)의 ‘모노톤’이 깔끔하고 청초하다. 대신 도심지 가깝게 사는 까치는 때 묻은 옷을 입은 듯 정갈한 느낌을 감해 준다. 그래도 그 까치들은 깨끗한 산 속을 찾지 않고 도심지 근처에서 눌러 살기를 고집한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살던 그리운 곳이 그 까치들의 낙원이 되고 있는 듯싶다. 공장 굴뚝 옆 나무에 둥지를 틀기도 하고, 학교 운동장 시끄러운 장소를 택하는 경우도 있다. 교회 마당의 나무 둥지에 사는 까치는 들려오는 복음 소리와 찬송가를 듣기 위함에서인가. 산사山寺 뒷산에 둥지를 튼 까치는 아마도 독경(讀經) 소리와 선(禪)의 경건함을 배우려 함이고, 그윽한 풍경 소리의 삼매경에 취하려 함일 것이다.

호숫가 미루나무에 쓸쓸하게 비어 있는 까치집, 언제까지 그렇게 빈 집으로 있어야만 되는 것인가. 너희들 까치가 명당자리로 택한 그 풍수지리(風水地理)의 차원 높은 안목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웬만하면 그 집에 다시 돌아와 사는 게 어떨지 한번 타진해 보는 것이다. 사람도 헤어졌다가 돌아오는 수가 많다. 살자면 이런 일 저런 일, 참아야 할 일이 많은 법이다. 양보할 수 있는 것인지, 또는 용서할 수 있는 것인지를 한 번 다시 생각해 보려무나.

 

전 이화여대 교수. 현 한국 미술협회 고문. 공예가.<창작수필>로 등단. 수필집 『임홍순 목조형·수필』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