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우리의 햇빛은 있더라

 

                                                                                           吳景子

지지난 해 추석 이튿날, 50대 중반의 부부로 보이는 낯선 남녀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대문을 열자 그들은 정중히 인사를 하며 뒷집을 사서 빌라로 개축을 하려는데 혹시 집을 파실 의향이 있으신가 해서 방문했다고 말했다. 공사가 시작되면 무척 힘들 것이니 적당한 값에 집을 팔라는 얘기였다. 남자는 격에 어울리지 않게 공손한 태도로 말했고, 여자는 몸을 흔들며 잘 사귀어보자고 애교를 떨었으나, 내게는 그들이 협박을 하는 것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우리는 40년 가까이 이 집에서 살아 정이 많이 들었고, 이사 갈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고 대답하며 혹시 우리 내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때나 한 번 와 보라고 말했다. 날아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놓은 집이나 잘 지어 이웃으로 지내자는 말을 덧붙이며 나의 최대 관심사인 대지 경계선과 신축 건물과의 거리는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1미터라고 하기에 그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공사가 시작되자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집짓기가 끝날 때까지 오만 가지 소음에 시달렸고, 먼지와 쓰레기가 쏟아져 내려 우리 뒷마당과 지붕 위는 쓰레기통이 되었으며, 레미콘 차를 비롯한 온갖 차량과 자재더미로 집 앞 비좁은 골목길은 통행 불가능 상태가 되곤 했다. 가장 힘든 일은 수없이 들고나는 낯설고 거친 남자들과 구비구비에서 마주치는 일이었다. 그들은 우리 집은 물론 다른 이웃에게도 그토록 폐를 끼치면서도 미안한 기색이나 배려는 전혀 없었다. 공사장 감독이란 사람은 현장에 있다가도 핸드폰을 사용할 때는 소음을 피해서인지 내 방 들창 밑에 와서 악을 써 대서 그 목소리만 들어도 혈압이 치솟곤 했다. 조용하고 한적하던 우리 골목에 다시는 평화가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늦가을에 시작된 공사는 이른 봄철에야 끝이 났다. 1미터는 띄어 놓는다던 말과는 달리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로 바투 집을 지었다. 나도 담 위에서 수월하게 그 쪽 창문 안으로 넘어설 수 있었다. 공사가 시작될 무렵 설계도를 보고 항의했으나, 건축주는 자기는 건축법에 따랐을 뿐 1미터 소리는 한 적도 없다고 나보다 더 큰 소리로 호통을 쳐댔다. 그는 운수도 좋아서 삽시간에 집을 모두 분양해 버렸다.

이듬해 그 뒷집에 사는 현이네가 집을 헐고 빌라 건축을 시작했고, 우리 집 남서쪽 축대 위에서도 공사가 시작되었다. 꽤 큰 이층집 두 채가 있었는데 한 업자가 몰아사서 16세대를 짓는다고 했다. 뒷집과 달리 남서쪽에 거대한 성벽이 들어서니 더 기가 막혔다. 공사장 소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햇빛을 잃었고, 바람마저 잃게 되었다. 장마철이 시작되면서 공사현장의 하수도를 방치한 채 공사를 하여서인지 우리 지하실에서는 전에 없이 샘이 콸콸 솟아올랐다. 구청 건축과로, 설계사무소로 감리까지 찾아 항의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도급을 맡은 건설회사의 현장소장이라는 젊은이가 싹싹해서 말받이를 잘 해주고, 우리 집에 드나들며 여기저기 잔손 갈 곳도 손질해 주며 나를 도닥거렸다.

초가을에 건물이 완성되어 분양이 시작되었다. 커다란 플래카드를 건물은 물론 골목길과 큰길에까지 요란하게 걸어놓았다. 그들이 내건 분양 캠페인은 ‘기차게 전망 좋은 집, 북한산 비봉이 눈앞에 펼쳐지는 집’이었다. 우리의 햇빛과 우리의 바람을 빼앗고 나서 하는 말로는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되었다. 집 앞을 지나가는 현장소장을 불러 세워 한 마디 했다. 건축주가 위로의 말 한 마디 없고,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고, 남의 동네에 와서 고통을 주었으니, 나는 이제 분양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 지붕 위에 플래카드를 걸어 항의 시위를 하겠다고 했다. 젊은이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플래카드에는 ‘2004년 고층 아파트 신축 예정지’라고 쓸 거야. 주인에게 전해요. 플래카드 맞추러 가더라고.”그런데 한 가지 위안되는 일이 있었다. 앞집에서 자기네는 이대로 사는 것이 소원이니 이사 가지 말고 의지해서 함께 살자는 말이었다. 이제 우리 동네에 단독주택은 우리 두 집만 남았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나는 왜 이 집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지……. 40년을 마주보며 살던 복덕방 영감의 태도도 서먹서먹해지고, 두 달에 한 번 경로요금으로 머리를 잘라주는 미장원에도 괜히 미안하고, 두 내외 살림이라 이따금 두부나 한 모 팔아주는 구멍가게에도 미안한데…….

새 봄을 맞고 여름이 무르익고 있다. 햇빛도 바람도 잃어버린, 우물 속에 빠져버린 것 같은 뜰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모과, 감, 호도, 귤나무에 다른 해보다 더 많은 꽃이 피더니 열매도 많이 열렸다. 고추와 호박도 무수히 열리고 있다. 일조시간이 줄어든 만큼 나무들은 햇빛을 따라 더 높이 자라고 더 넓게 가지를 뻗는가 보다. 나는 자연의 위대함에 새삼 감격하며 이웃에게 쏟아낸 내 모진 말을 후회하고 있다.

부동산 경기의 위축으로 현이네는 아직 한 채도 팔지 못했고, 축대 위의 전망 좋은 빌라도 몇 채 못 판 듯 깜깜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