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천료>

 

철쭉이 지나간 자리

 

 

                                                                                          배채진

마을에 도착하니 큰 돌이 하나 우뚝 서 있었다. ‘立石마을’이라고 새겨진 다른 돌은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고, 이정표가 가리키는 그 돌은 선돌이었다. 돌이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마을의 지형이 배 모양이었기로, 선여사船餘寺라는 이름을 가진 절의 돛대를 선돌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선돌은 고인돌에 비해 수가 극히 적지만 그 분포는 광범위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세워져 있다는 이유로 유적으로 잘 인정받지를 못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학술조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쉽다.

사실 ‘구름에 달 가듯이’ 하는 여행도 낭만적 여행이지만, 주제를 가지고 그 주제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행도 묘미가 있는 여행이다. 그렇다면 선돌 찾아 나서는 여행도 해볼 만한 여행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모이기로 한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우린 ‘파이팅’을 한 번 크게 외친 후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철마산은 부산 근교의 작은 산이다. 그 높이가 겨우 605m이다. 하지만 개방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비교적 때가 덜 묻었으며, 가을의 억새와 늦봄의 철쭉으로 뒤덮인 길의 매력 때문에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산이다. 난 지난 해 바로 이맘때에도 이 산에 올랐었다.

오늘 산행의 표어는 ‘철쭉 따라 봄길 따라’였다. 하지만 올라보니 오르는 산길 어디에도 철쭉은 없었다. 작년 이맘때 올랐을 때에는 철쭉이 분명 꽃으로 있었는데 말이다. 한 차례 후드득 스쳐 지나가버렸다고 누군가가 말한다. 이 해 따라 빨리 온 봄 때문에 철쭉은 소낙비 스치듯이 그렇게 한 차례 스쳐 지나가버렸다는 것이다. 봄조차 이 시대의 빠름의 물결에 휩쓸리는 것인가. 왜 그리 빨리 왔다가는 빨리 가버리는 것인지.

하지만 철쭉은 있었다. 꽃으로는 없었지만 가지로 잎으로, 그러니까 나무로는 있었다. 푸념하는 사람들에게 내 여기 이렇게 있지 않느냐고 애소하듯 앉아 있었다.

한참 가다 보니 철쭉꽃 몇 송이가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뜻밖이었다. 남 갈 때 따라가지 못한 이른바 게으른 철쭉이었다. 철쭉, 그나마 철쭉을 꽃으로 본 것이다.

뒤처진 저 몇 송이의 철쭉 아니었으면 철쭉을 꽃으로 영영 보지 못한 채 이 봄을 보낼 뻔했다. 늦봄인 이 봄을. 게으름의 미학, 이른바 느림의 미학을 여기서 만났다. 철쭉의 게으름이 기쁨을 주었다.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슬그머니 뒤로 처졌다. B대의 P교수가 뒤로 처져 뒤따르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몸집이 아주 크다. 함께 동행하던 말레이시아 인 교수 둘이 일찌감치 낙오할 때, 과연 오를 수 있을는지 걱정하던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내가 뒤처진 것으로 보이면 그에게 마음의 부담을 줄 것 같아 나 혼자 바위 보고, 바람 맞고, 게으른 철쭉과 수작거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그런 나의 심중을 바위와 나무와 철쭉이 알아챘는지 빙그레 웃는다. 저만치서 바위 한 쌍이 껴안고 있다. 유달리 정다운 모습이어서 다시 보니 사랑하는 모습이었고, 또 다시 보니 이별하는 모습이었다. 사랑과 이별은 바위에게도 절실한 주제인 모양이다.

우리는 일행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정상에 도착했다. 그는 뒤처진 자기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나무나 풀과 수작걸면서 오르는 나를 고마워했다. 그런 나의 수작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 나의 배려가 참 편안하다고 했다.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다.

하지만 나의 그 동작은 게으른 철쭉에게서 방금 배운 것이다. 난 사실 동작이 아주 빠른 사람이다. 걸음도 빠르고 말의 속도도 빠르다. 걸음이 빠른 내가 뒤처지는 모양새를 취했으니 어찌 보면 그것은 속임수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속임수라 생각하지 않고 느림수라 생각했다.

먼저 올라 즐기는 산도 산이지만, 뒤따라 오르는 산의 바람도 시원하기 그지없다. 그래, 앞으로는 더러 느림수를 취해야지. 자동차 속도도 더 줄이고. 내려오는 길에 늪을 만났다. 질펀한 늪 여기저기에는 노란 꽃이 피어 있었다. 다른 늪에서도 꽃은 노란 꽃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다면 늪과 노란 꽃은 무슨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발이 젖을까 발목을 높이 들면서 천천히 걸으니 걷는 쾌감이 묘하다. 빠질까 조바심하는 걸음걸이가 원시인의 동작 같아서 절로 웃음이 나온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 그리고 『깊은 강』에서의 ‘늪지대론’이 생각난다. 그에 의하면 늪은 무화(無化)의 장소이다. 늪은 한없이 흡수하며 수용한다. 모든 잡것들을 수용해서는 동화시키고 희석시킨다. 그래서 늪은 무의 세계이다. 이는 부드러움의 승리, 늪의 한없는 부드러움의 승리이다. 이 무(無)를 엔도는 한없는 부드러움과 자비의 구체화로서의 어머니로서 형상화한다. 늪은 여성, 어머니인 것이다.

엔도는 자기 소설에서 궁극적 실재, 그러니까 신의 여성성과 어머니성, 늪지대성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 늪은 선악을 불문하고 모두 수용하는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늪은 사실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늪지대에서는 논리적인 것, 합리적인 것, 거대한 것, 그러니까 거대 담론, 빳빳한 것들은 맥을 못 춘다. 아무튼 그는, 서양 종교의 남성적 신은 동양(일본)이라는 늪지대에 와서 무화되어 버렸다는 점을 말하려고 했다. 서양 종교의 부성적인 신은 동양 종교의 모성적인 신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철마산 다음에는 망월산이 연이어 있다. 두 산의 정상을 차례로 오른 후  우리는 휘청거리는 두 다리에 의지하여 겨우 내려왔다. 문득 돌아보니 철마산이 저만치 뒤에서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기슭의 작은 마을 예배당은 유달리 희었고, 하늘은 푸르고 푸르렀다. 한줄기 바람은 참 시원했다. 우린 내년 이맘때에도 철쭉 보러 오자고 약속했다. 와서는 ‘철쭉 길 늦봄 길’을 함께 걷자고 했다. 난 또 그때에도 늪지대를 스쳐 오르자고 말했다.

 

<`천료 소감>

저의 글을 읽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딱딱한 글(논문)을 쓰고 읽는 저에게 글의 부드러움은 절실한 과제입니다.

변변치 못한 글인데 내치지 않고 이리 가려주시니 부드러움의 승리를 예서 또한 배웁니다. 마하고 정진하겠습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 입학홍보처장. 철학박사(서양 철학).<창작 천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