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천료>

 

묘(妙)골마을

 

 

                                                                                          권민정

대구(大邱) 가는 기차를 탔다. 욕심 때문에 지조도 의리도 다 버리는 세상에서 충절의 고장인 묘골이 생각나서다.

내가 묘골마을을 알게 된 것은 외할머니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이모할머니를 통해서다. 외할머니와 동생 되는 이모할머니는 생전에 묘골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두 분은 당신들이 묘골 순천(順天) 박(朴)씨인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셨다. 이모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도 고향 집 이야기를 하시며 꼭 한 번 가보라고 당부하셨다.대구시 달성군 하빈면에 있는 묘골은 사육신(死六臣) 중 한 분인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선생의 후손인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단종(端宗) 복위사건 때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집안에서, 3대(代) 9명이나 되는 남자가 다 죽임을 당하는 참변 속에서도 후손이 이어졌다.여기에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름 없는 한 여종이, 같은 날 태어난 취금헌 선생의 손자를 자신의 아기와 바꾸어 살려냈다는 것이다. 그 주인의 아기는 남자로 태어나면 죽이라는 어명이 이미 내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 여종은 산골로 숨어 들어가 지극한 정성으로 아기를 키웠다. 그 아기가 나중에 세상이 바뀌었을 때 성종(成宗) 임금께 사면되어 박일산(朴壹珊)이라는 이름을 받은 묘골 순천 박씨의 시조始(祖되)는 분이다. 다행히 여종이 딸을 낳았다고 하는데, 극작가 오태석은 연극 ‘태(胎)’에서 작가의 상상력으로 여종이 아들을 낳는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묘골은 마을 모양이 참 묘하게 생겼다. 마을이 길이 나 있는 남쪽으로 조금 터졌을 뿐, 한 마리의 용이 얼굴을 돌려 꼬리를 보는 형상으로 낮은 산이 삼면으로 둥글게 두르고 있다. 그래서 마을이 무척 아담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기적적으로 살아난 박일산 할아버지는 그 후 많은 후손을 남겼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번성했을 때는 그곳에 수백 채의 기와집이 있었다고 하니, 무척 큰 집성촌이었을 것이다.마을에는 박일산 할아버지가 지은 태고정(太古亭)이라는 정자가 남아 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태고정 옆 산 바로 아래 육신사(六臣祠)가 있다. 육신사는 사육신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이다. 이 사당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불을 지르고 도끼로 찍어버리려 했으나 끝내 헐어버리지 못했으니, 이는 오음 윤두수 선생이 읊은 대로 ‘신명이 옳다 하고 하늘이 도우셨기(神明自是蒼天佑)’ 때문이었을 것이다.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은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내며 ‘아아, 선비로 태어나서 몸을 바쳐 임금을 섬긴 사람은 헤아릴 수 없었으나, 그 마음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다가 죽은 사람을 찾아보면 상(商)나라에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있었을 뿐이라 했는데, 참으로 백세(百世)의 사표(師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는 제문(祭文)을 남기기도 했다.(조선시대 수많은 선비들이 이곳에 와서 시를 짓고 사당에 들러 칭송하는 글을 남겼다.)태고정 아래에는 몇 채의 고가(古家)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 중 하나가 외할머니와 이모할머니가 태어나서 자라고, 또 내 어머니가 태어난 집이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 등으로 어려운 시절을 지내오면서 남의 손에 넘어갔지만 지금은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산 위에서 마을을 바라보노라니 충성스런 조상의 이야기, 충복(忠僕)의 이야기를 해주시며 “옛날에는 사람들이 참 의리가 있었어” 하던 할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수백 년 동안 할머니에게서 손녀에게 전해진, 의리를 지킨 충성스런 여종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어떤 옛날이야기보다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아기의 생명의 은인

이며, 후손들에게는 할머니 같은 존재인 그 여종을 기념하는 추모비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것이 있었더라면 묘골이 얼마나 더 빛났을까 하는 마음에 적잖이 섭섭했다.한때 나는 한 임금에게 충성하며 의리를 지키는 일이 아버지, 동생들, 자식들까지 모두가 학살되는 그런 참변을 당할 만한, 그렇게까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혼란스러웠다. 당신 한 몸 죽는 것이 아니라 온 집안 식구들이 죽거나 노비가 되는 일을 세조(世祖)의 회유(懷柔)가 있을 때도 끝까지 거절했다는 데에 너무 비인간적인 차가운 성품을 보는 것 같아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나 취금헌 선생이 울면서 아버지에게 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메였다.“왕(王)에 충성하려니 효(孝)에 어긋납니다.”그의 아버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한다.“충성(忠誠)하지 않으면 효(孝)가 아니다.”자기가 옳다고 믿는 신념을 지키느라 죽음에 이른 분들이 많다. 그의 생애(生涯)에 있어서보다 사후(死後)에 더 중요한 인물이 된 분들이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그러하고, 순교자 이차돈이 그러하다. 취금헌(醉琴軒) 선생, 그의 호(號)와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산 분이다. 그분도 술과 음악에 취해 풍류로운 삶을 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세월은 그분에게 그런 풍류를 허락하지 않았다. 묘골마을에서 태어난 그 후손들은 그런 조상의 자손인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그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세상이 혼탁해서 숨이 막힐 때면 나는 다시 묘골을 찾아 지난날의 그 충신을 생각하고, 충복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세파에 휩쓸리려는 자신을 그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장릉지(莊陵誌) 보유(補遺)'

 

<천료 소감>

기쁘고 행복합니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가 봅니다. 내 뜻과는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귀중한 것을 잃었다는 상실감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어서입니다.감히, 읽는 기쁨을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같이 공부하는 문우들,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 감사합니다. 모자라는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좋은 글을 쓰는 것이 보답하는 길이겠지요.

 

성결대학교 강사. 전 한국노총 여성부장. 현 법무부보호관찰 전문위원.수필동인지 『밀물과 썰물』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