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멍덩

 

                                                                                      김시헌

라디오 KBS는 전일 방송을 한다. 틀어놓으면 종일 말이 나온다. 어떤 때는 시끄럽다면서 짜증스럽게 꺼버린다. 라디오에게 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밤중에 잠이 오지 않으면 '옳아' 하면서 어설프게 일어나 라디오의 스위치를 돌린다. 기다렸다는 듯이 '왕!' 하고 말소리가 터져나온다.

토론이 벌어지는 때가 있다. 이를테면 사형제도를 폐지할 것이냐, 존속할 것이냐를 두고 전문가들이 나와 법 이론을 전개한다. 세 시간, 네 시간씩 계속한다. 듣고 있으면 어느 쪽에나 일리가 있다. 처음부터 한쪽 이야기만 들었다면 그 방면에 무식한 나는 단번에 따라갈 것 같다. 그러나 반대쪽 이론도 그럴 듯하다. "맞아, 그래!" 하는 수긍이 간다. 그들의 이론에 빠져들기만 하고 나의 판단력에는 마비가 온다. 기준을 잃어버리는 나를 한심한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잠에 들 때가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다는 쪽으로 판별이 분명했다. 어떤 때엔 정치적인 문제를 두고 여당과 야당의 토론이 벌어진다. 당론을 따를 것이냐, 자기 개인의 의견을 따를 것이냐의 문제가 있을 터인데, 철저히 당론 편이 된다. 내겐 은근히 인간적인 불만이 온다. 당론은 이렇지마는 내 개인의 의견은 저렇다고 할 수 없는 그들의 지성이 미워진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하랴, 고 가정을 해 본다. 누가 국회의원을 주지도 않지만 그런 때는 차라리 국회의원을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라디오를 끈다.

'진리는 하나뿐이다'를 믿고 살아왔다. 그러나 요즘은 둘도 되고 셋도 된다는 생각이다.

 

장자는 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꿈에 나비가 되어 자유를 누리다가 잠에서 깨어 보면 나비가 아니고 자기는 사람이다.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의 혼돈에 빠진다고 하였다.

장자뿐이랴? 아주 현장감이 짙은 꿈은, 누구든 그러한 혼란에 조금은 빠진다. 장자는 우화를 좋아했다니까 우화를 위해서 그렇게 간곡한 표현을 했을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살고 있는 현재를 가상의 세계라고 말한다. 가상의 세계를 진짜로 믿고 온갖 욕심을 다 부린다는 것이다. 현재는 곧 물거품처럼 푹 꺼져버리는 것이니까 그 가상에서 깨어나 영원을 찾으라고 권한다. 그럴 듯하다.

나는 불교 책을 즐겨 읽는다. 불교가 뭔지 아직 잘 잡히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끌린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가 아니고 현재만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얕다. 무엇인가 더 큰 것을 기둥처럼, 산처럼 믿으면서 살고 싶다. 또 그것이 현재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고 믿는다. 그래선지 어떤 때는 세계가 온통 한 덩어리로 보인다. 해도 달도 허공도 사람도 나도 한 덩어리 속에서 일렁거리는 것이다. 그것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움직이고 있으니 마침내 나는 그 속의 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도 내가 무엇인지 구별도 어렵다. 그 한 덩어리가 영원히 돌고 돌면서 존재한다면 그곳에 무슨 죽음이 있고 삶이 있으랴? 그냥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몇 시간이 못 가서 나는 가상의 세계라는 현재의 나로 어느덧 돌아와 버린다. 장자의 꿈 이야기 비슷하다. 장자는 꿈이 현실이냐, 현실이 꿈이냐로 의심이라도 했지만 불교는 그 의심조차 없다. 굳게 믿고 있다. 하기야 굳게 믿지 않는다면 종교가 될 수도 없지만…….

 

나는 지금 80이 되었다. 어느덧 그러냐고 스스로에게 놀라는 때가 있다. 50대 때엔 앞으로 10년만 더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몸이 너무 허약해서 수명에 자신이 없었다. 어떤 때는 나이를 잊어버리고 살자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고 보니 잊어버리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별것 아니다. 잔재주를 부려보아도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간다.

그런데 이 혼돈을 이해할 수 없다. 사형제도를 둘 것이냐, 없앨 것이냐도 그렇고, 당론을 따라야 되느냐, 자기 주장대로 살아야 하느냐도 그렇다. 그게 그것 같고, 저게 그것 같다. 나이 때문이라고 핑계를 찾아본다.

임어당은 멍청하게 살라고 권한다. 너무 따지는 세상이 싫어서 하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멍청이 아니고 지금 흐리멍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