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 듣기 좋은 이야기 셋

 

                                                                                      김수봉

─ 하나

"나 요즘, 갑자기 내게 큰 돈이 생길까봐 걱정이여."

'걱정도 팔자라더니' 하며 한 친구는 벌써 이쑤시개를 물고 의자에 잦바듬해 버린다. 돈이야 많을수록 좋은 거고 굴러들어온 돈이라면 더더욱……. 이런 생각을 보통 사람이면 다 갖는 세상이 아닌가.

직장에서 정년을 하고 풍족하지도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는 연금생활을 하는 친구들이 월례로 만나서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큰 돈' 걱정을 하는 친구는 불문학자요 시인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요즈음 신문 방송에서 걸핏하면 터져 나오곤 하는 복권 당첨, 억대 연봉, 수십억 상금, 차떼기 돈, 굴비상자 돈 같은 거액 뇌물사건들이 스쳐간 모양이었다.

화제는 자연 그런 쪽으로 흘러갔다. '복권 당첨 인생 역전'이라든가, 당첨금을 놓고 친구끼리 또는 부부가 서로 더 가지려 싸우다가 마침내 이혼하고 살해까지 하게 된 이야기, 큰 재산을 놓고 부모 자식 간의 갈등과 반목, 이런 얘기들이 한참 꼬리를 물었다.

평생 어렵게 모은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내놓는 할매도 있고, 불우 이웃을 돕는 미담도 이어졌다. 돈은 벌기보다 '잘 쓰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결론쯤에서는 모두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큰 돈이 생긴다는 건 즐거운 일일 것 같지만 '큰 돈'을 운영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겐 그 순간부터가 괴로움일 것이다. 나이 들어 인생의 황혼을 맞는 사람은 더욱 그럴 것이다.

시인 친구의 말을 되새기고 있자니 오늘 따라 '무소유'의 의미가 절실해진다. 꿈속에서라도 나는 큰 돈이 생길까 걱정이 된다.

 

─ 둘

결혼식장 피로연 자리, 좀 늦게 들어온 ㅈ교수가 "여! 모두 우리 식구들이구먼" 하면서, 대부분 아는 얼굴의 하객들과 인사를 나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날의 혼주가 같은 대학의 현직 교수인데다, 정년퇴직한 지 일 년 남짓인 ㅈ교수로서는 오랜만에 만나는 전 동료들과 후배들이어서다.

요즘의 결혼식장은 새로운 만남의 장소로서의 역할도 한다. 동향, 동문, 직장의 동료들이 약속 없이도 만나지는 곳이고, 오래 못 보던 사람을 깜짝 만나지게도 한다.

ㅈ교수는 좌석에 앉지도 않고 여기저기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더니, "어이, 친구들. 뭐 재미있는 일 없는가? 나 좀 데리고 가 줘. 나도 돈 낼게" 한다.

그는 대학 재직 중에 대학원장에 부총장도 지냈던 분이다. 학문도 그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늘 바쁜 나날이었다. 만날 사람과 할 일도 메모 없이는 실수가 따랐다.

그런데 정년 후 얼마간은 갈 곳도 많고 불러주는 사람도 많은 듯싶더니 몇 달이 지나자 하루라는 시간이 엄청 길게 느껴지는 날이 늘어갔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여 자청해서 만나잘까 하다가도 면구스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흘은 바쁜 것 같아도 사흘은 뼛속까지 외로운 날들, '삼한사온'의 의미를 여기서도 깨달아야 했다. 아침에 나가고 저녁에 들어오던 평생의 생활 리듬이 변화의 회전에 쉽게 갈아타지지 않는 것이다.

'나, 많이 외롭다네. 자네들은 어떤가? 후배님들, 머잖아 자네들도 내 마음 알 걸.', '뭐 재미있는 일 없는가. 나 좀…….'

ㅈ교수의 이 말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유되어 있었다.

이 날 그의 밝은 웃음과 익살스러움이 내 귀에는 '그대들 마음 내 다 알지' 하는 소리로 들려왔고 가슴을 울렸다.

 

─ 셋

토요일 오후 6시,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이 모이는 날이다. 한 친구가 30분도 더 늦게 들어서며 묻잖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출가한 딸애가 살던 집을 팔고 새 집을 샀는데 등기부상 문제가 생겨 누구누구를 만났다는 얘기며, 고향의 친척집에 초상이 나서 안 가볼 수 없어 다녀오는데, 아내가 또 주문해 놓은 한약재를 받아오라는 전화를 해서 한방병원에 들러…….

이런 식으로 숨가쁘게 늘어놓더니 '후유' 한숨을 토해 내며 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다만 늦게 온 벌로 '자, 자' 하며 술잔들을 내밀 뿐.

그리고 한 순배의 술이 돌자 나이 많은 사람 특유의 추억담으로 목소리들이 높아지기 시작한다.

이때 그가 말했다. 그는 이 모임의 좌장 격으로 나이도 두어 살 더 많아 늘 형님 유세하기를 좋아한다.

"늙으면 하루에 한 가지씩만 일을 하는 거여. 옛 어른들도 그런 말 하잖던가. 이것저것 벌여놓고 이일 저일 하려다간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한다고."

당연하다. 늙으면 뇌세포가 퇴화하고 깜빡깜빡 잊으며 행동은 굼떠진다. 나이 들면 여기저기 관여하고 간섭하지를 말든가, 차라리 '몸이 젊었을 때 같지 않아'란 말을 달고 다니지 않든가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