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평>

 

나는 나를 찾아 떠난다

 

                                                                                                 박장원

1.

최병호의 사양 놀이 화사한 '차창 가에서'는 인생의 파노라마가 풋풋하게 흐른다.

 

도착을 알리는 방송에 이어 신호 때문인지, 정체 때문인지 몇 번인가 멈칫거리던 버스가 마침내 터미널에 당도했다. 가만히 눈을 떴다. 차창엔 사양 놀이 화사한 유화를 그리고 있다. 나는 그 빛살을 얼굴에 가득 받으며 천천히 안전띠를 풀고, 물길처럼 빠져나가는 통로의 흐름에 소리 없이 끼어들었다.

 

잽싸게 달려가서 확인하고 이를 복명하지만, 예약의 편의로 특정 창구에서 느긋하게 표를 받아보지만, 결국 자리는 그 자리가 그 자리. 이제는 앞을 좇을 수 있는 확 트인 자리가 아닐지라도 창턱에 팔꿈치를 괴고 있으면 제 스스로 들도 산도 다투어 오고, 창설주로 옹색하여 넓은 창가는 아닐지라도 폭신한 의자에 깊숙이 앉아 눈감고 꿈을 타면 편안한 여로가 된다.

그게 그거야.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들을 일이지, 황망히 돋보기, 돋듣기를 챙겨대는 것이 부질없는 객기일 뿐이라는 소탈한 감회가 꽤나 정겹다. 그리고 그는 모두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공손히 예를 표한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형진의 몽롱한 '작은 불빛'은 퍼뜩 영혼의 자유를 좇는 꿈처럼 아렴풋하다.

 

꿈인지 생신지 몽롱한 가운데서 자지러지는 어린애 울음소리를 듣는다. 계속되는 울음소리에 잠에서 깬다. 어느 때쯤일까. 방 안은 아직 깜깜하다. 상경길이 고되어 초저녁에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쉬 일어날 수가 없다. 울음소리가 더 또렷해지면서 안방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퍼뜩 정신이 든다.

 

그 작은 불빛을 '등불'과 '호롱불'이라 하듯이, 거대한 문명세계 속에서 의식의 흐름이 감감도하지만, 인생의 미로를 허든허든 되짚으며 인파에서의 자신의 실재를 조마조마하게 일깨운다. 때문에 어스름을 뒤집어쓴 황량한 도시의 빌딩 숲이 허우적이게 할지라도, 어수선한 휘황한 불빛에 머릿속이 멍해질지라도, 쓸쓸히 잠들지 못하는 그의 내면은 새록새록 밝아온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발등을 밟히며 죽은 듯이 서 있어야 하고, 도착지에 닿기 위해 내려앉는 눈두덩을 버틴겨 뜨고 아스라이 솟아오른 시멘트 층계를 팍팍한 다리에 힘을 주어가며 터덕터덕 오르면서, 그가 읊조리는 소리가 처연히 울려 퍼진다.

"왜 아파, 아프지 말아야지."

 

오차숙의 '터널 속의 긴 여행'의 로드맵은 숨막히는 투명함이다.

 

목적지가 투명하게 설정된 곳으로 핸들을 돌리며 '의미 있는 나들이'를 하기 위해, 터널 속에서 숨이 막힐 때 'U턴 하지 못하는 삶'에 회의를 느끼지 않기 위해, 일주일에 '네 번씩 돼지갈비'를 먹지 않기 위해, 서로의 존재감을 의식하며 밤하늘을 바라본다. 서울 밤거리에 깔려 있는 갖가지의 불빛과 치열하게 교류하며 조촐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실존적 인간은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통해 존재하기에, 남편인 그 사람이 클릭한 삶에도 그토록 냉담한 것일까. 인생의 터널 속에서 삶의 한계성에 진저리를 치며 되돌아갈 수 없는 삶에 고개를 숙이며, 이 자체가 삶이 아니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그 사람과 함께 한 29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며칠 전 결혼한 딸아이의 전도를 예단해 보는 강박관념으로 끝내 터널 속은 헉헉거린다.

그렇지만 세대가 바뀐 세월은 이미 남춘천 뚝길을 지나 저만치 가버렸고, 그 시간은 되돌리지 못한다. 다만 현대생활의 소용돌이 속에서 찾은 소박한 실천 하나를 터널에서의 출구로 상징한다. 생명력 넘치는 세상을 찾아 영혼까지도 상납하지만 결국 서성이는 외출로 종지부를 찍게 되고, 불안하게 걸어가는 그들의 미로에서 인생의 이정표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리시오."

 

2.

신현복은 '왕할아버지'의 101번째 생일을 통해 삶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표출시킨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온 그 날 오후, 아버지께서는 서재로 들어가셔서 외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셨다. 우리는 너무 놀라서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려고 저러시나 하고 모두 문 앞에서 귀를 기울이는데, "아버님, 저희는 잘 있습니다. ……. 네, 별일 없습니다. ……." 그리고 한참 만에 서재에서 나오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우리는 차마 뵐 수가 없었다.

운명은 거대한 거미가 짠 실인가. 생로병사의 얼개가 인터넷 웹처럼 얼키설키 뒤엉켜 있다. 누가 그 삶의 디지털을 아날로그로 설명할 수 있으며, 혼돈의 실타래를 가지런히 할까.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까'라던 성현이 왠지 인간적이다. 지금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자신을 시집보낸 어머니는 77세의 삶도 채 못살고, 백수白壽를 넘기신 할아버지는 설날 세배를 받지 못했다며 음식점 카펫에서 절을 시키는 건강한 모습에서 그가 서사하는 인생은 현묘하게 흐른다.

어머니가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시기 때문에 외할아버지를 뵙고 싶지 않아 101번째 생신날 가지 않았다는 슬픈 이야기를 빗대 드러내는 삶의 방황은 과감하면서도 성공적이다.

 

이미연의 '와인 한 병 주세요'라는 자신에 대한 외침은 상큼하고 활기차다.

 

각 나라말로 쓴 와인 리스트를 보니 여고 시절 생각이 났다. 친구랑 나는 알고 있는 영화배우 이름을 적기로 했는데, 대부분 외국인이라 발음도 생소한 배우들 이름을 정말 많이도 적었다. 둘이서 쓰고 보니, 커다란 칠판을 빈틈없이 메웠다. 지금은 억지로 기억하려 해도 몇 명을 제외하고 잘 생각나지 않았다. 열심히 읽고 있는 와인 리스트도 언젠가 기억 속에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의 삶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으로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친 것들과의 원만한 조화를 찾으려는 수필적 에쎄는 발랄한 생기와 안정감 있는 호흡을 지니고 있다. 무엇을 해보아도 그것들은 온전히 내 것일 수 없으며 결국 유행을, 옛것을 좇으면서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내지만, 한 가지만을 고집하지 않는 타자에게 둘러싸인 나는 본디 그대로 일 수 없다는 빈티지(vintage)를 도출시킨다. 열심히 읽고 있는 와인 리스트도 언젠가 기억 속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지만, 그는 삶의 이미지를 클로즈업시키면서 스스로를 자신 있게 증명한다. 까치발을 하면서까지 커다란 칠판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메웠던 인생의 요소를 나만의 비율로 조합한 향으로 숙성시킨 와인 한 병을 자기에게 건네기 때문이다.

 

구민정의 '날개 달기'는 삶의 모니터에 대한 일탈이자 간절한 되돌아봄이다.

 

칠십 평생 남에게 의지 않는 삶을 살아온 아버지는 계단을 오르면서도 내게 기대는 것조차 불편해 하셨다. 그 가느다란 떨림이 내게는 전율로 다가온다. 용돈을 드리려다 보니, 아버지의 손엔 우황청심환이 들려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본 나 역시 돌아와 안정제를 먹어야 할 지경이었다.

 

우리가 존재하는 집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창문이 닫혀 있는 것이고, 얼마나 열어보게 될지는 몰라도 그 창문을 하나하나 열어보는 행위가 바로 인생의 또 다른 모습이다. 경륜장 개장을 기다리며 지하철역 통로에서 초점 잃은 듯한 군상들의 칙칙한 분위기를 도망치듯 빠져나오지만, 그 공간도 결국은 존재의 집에 달려 있는 또 하나의 창문이다. 다만 활동적인 오빠를 통해 순서의 완급이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이런 시간이 그에게 어둠이 내리면 까치들이 비상하던 그곳 달빛 살폿한 공간에서 자아탐구의 기회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 무렵에야 비로소 날개를 펴듯이 말이다.

 

3.

<계간 수필> 2004년 가을호에는 천료 작품을 포함해 34편이 실렸는데, 그 중 3할이 여행을 중심 제재로 삼아 자신을 그리고 인생을 조망하였다. 소재를 형상화시키는 방법으로 사고·체험·관찰·독서 등을 거론하는데, 가시적·유무형적인 요소들을 직간접적인 체험을 통해 문학적으로 투영시키는 작업이니, 요약하자면 삶의 여정이 오감(視覺·聽覺·嗅覺·味覺·觸覺)을 통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감 따라 떠나는 삶의 푯말은 대부분 수필, 아니 나의 주제인 것이다.

일이 없으면 글이 없고, 사람이 없으면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말을 읽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을 읽는 데 있다는 윤오영의 이해는 쉬우면서도 뜻이 깊다.

결국 삶의 여정을 통해 자신을 말하는 것이 수필이기에, 쉬우면서도 심오하고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고 솔직하면서도 품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와 친했다고 언제 웃었다고 어디를 다녀왔다고 무엇을 하였다고 어떻게 슬펐다고 왜 그랬다고 해서 거침없이 주저리주저리 엮어들 낸다면, 그것은 푸념은 될지언정 문학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길이 시작되자마자 여행은 끝난다. 목표는 있지만 길은 없기에, 길이라 부르는 것은 망설임에 지나지 않는다고들 한다. 주저와 번민과 방황 그래서 힘겹게 인생의 표석을 찾았지만, 길은 말이 없다. 그래도 멈출 수 없는 것이 우리다.

굽히지 않는 삶의 여정에서 혹여 나를 빗겨가는 시간을 그리며 그 처절한 몸가짐과 간절한 기다림으로 홀로 서성인다. 하얀 꽃차례가 바람에 부슬대면 대지가 엎드리고, 찬 서릿발 거친 눈보라 속에 더디지만 늠름한 근위대처럼 행진하니, 되풀이되는 움직임은 엄숙한 억새의 삶 그것이다.

 

 

<수필문학>과 <계간 수필>로 등단(2001년). 수필평론가.

수필집 『양수리』, 수필평론집 『코끼리 이야기』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