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유경환

올해엔 과일이 잘 되었다. 풍부한 일조량 덕이란다. 태풍이 여러 번 왔어도 남쪽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 대부분이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과수원 옆길만 걸어도 이를 알 수 있다. 늦가을 들길을 거닐어보면, 바람자락에 묻어오는 단내음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산길 걷기는 머루 향기가 재촉한다. 머루와 포도를 교합시킨 머루포도를 요즘처럼 대량으로 재배하기 전에는, 숨어서 익은 머루가 발길을 숲으로 끌어들였다. 억새꽃이 볼 만한 가평 땅의 유명산 머루는, 그 진한 향기를 사람들 코에 발라주었다.

 

향기는 사람에서도 난다.

하지만 사람의 향기는 다르다. 사람의 말과 행동이 제대로 성숙하였다면 잘 익은 열매처럼 향기를 낼 것이다. 단내가 아니어도 사람들이 안다. 사람과 동물과의 차이, 이를 부정한다면 사람도 후각으로 좇아다니는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단내가 아니어도 맡을 수 있는 향이기에 '높은 향'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 높은 향은 맡을 줄 아는 사람만 맡는다. 그래서 능력 있는 문하생들이 따르게 마련이다.

사람이 지닌 향기. 범상치 않은 격이라 할까, 고결한 품이라 할까. 이런 인품을 지닌 사람이 풍기는 기품은 난향 못지않게 널리 퍼진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오래 퍼지는 향기다.

봇짐 지고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을 찾아다녔다는 말이나 높은 이름을 지닌 스님을 찾아 절을 헤맸다는 이야기는 모두 사람이 지닌 향기에 관한 이야기지만 이미 고사(故事)가 되었다.

조선조 때 향기 나는 사람 이야기는 종종 서원에서 들을 수 있건만 서당이나 향교처럼 서원조차 조락의 마당이 된 지 오래다. 성(聖)스럽다는 접두어를 붙인 사람들도 하나같이 사람의 향기를 전파한 사람들이건만, 된 발음으로 강조하는 선교 욕심 때문에 세속의 신앙인에겐 그 향기가 차단되는 때가 있다.

한여름에도 의관을 제대로 갖춰 입고 넓은 소맷자락 날리며 둑방길을 훠이훠이 큰 걸음으로 걷던 사람들. 이런 이들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더 갈는지 이미 아물거리는 저쪽에 가 있다.

 

나는 책에서 사람의 향기를 맡아보았다. 간디의 자서전, 러셀의 자서전, 그리고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 따위. 이 가운데 인도 땅 흙먼지 길에서 사람을 구름처럼 모은 간디의 그것은 설득 이전의 향기라고 말하고 싶다.

전문가의 말을 옮기면, 보기 좋은 그림이나 듣기 좋은 명곡은 그 미술품이나 고전음악 자체가 아름다워서가 아니고, 그것들이 사람 뇌에 있는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하는 회로를 자극시키기 때문에 아름답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요즘 크다는 인물에서 사람의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의 현실이 뇌의 한 부분을 자극시키지 못하기 때문일까. 어쩌다 이야기를 꺼낼 분위기가 마련되어 사람의 향기라는 말을 하면, 열의 아홉은 슬그머니 핀잔 같은 귀띔을 건네고 돌아선다. 요즘 같은 세상에 사람의 향기를 입에 올리고 살다니 참……. 그러면서 혀까지 쯧쯧 소리나게 차기도 한다.

"아니, 요즘 같은 세상이라니?" 하며 반문하면, 안색을 바꿔가며 귀머거리에게 이야기하듯 늘어놓는다. 웬만한 백화점이나 쇼핑몰 같은 시설에 쌓이고 쌓인 것이 방향제이고 또 사무실도 향기 연못처럼 차려놓고 집무 하는 세상이 바로 요즘 세상이야 알겠나 라고. 하는 수 없이 큰 백화점엔 못 가본 사람처럼 들어주는 수밖에 없다.

내가 들은 이야기 가운데엔, 요즘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은 덜 익은 과일처럼 풋내 나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한 마디에 귀가 번쩍 올라간 것은 '덜 익은'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삶은 달걀도 아닌데 덜 익었는지 어떤지는 무엇에 준거한 표현인지 알 수 없다. 그보다는 이런 세상이 또 끔찍한 사태를 불러올는지 몰라 걱정이다. 섬뜩하기로는 '덜 익은'이라는 표현보다 '설익은'이라는 표현에서 더하다.

'설익은'이라는 말을 숨어서 한 때는 44년 전이다. 정말 설익은 자들 한 무리가 들고 일어나 큰일을 낸, 돌이켜 생각만 해도 몸서리나는 사태였다. 그렇게 해서 생긴 '투사'들이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이끄는 그 사람들 아닌가.

 

덜 익었거나 설익은 과일이 있을 수 없는 이 늦가을에, 사람의 향기를 입에 올리는 것은 꼬부라진 나이 탓인가. 오래 살았던 역곡 집의 모과 생각이 난다. 향기 나는 사람을 찾다보니 향기 그윽한 모과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 집이 이제는 내 것 아니니, 마당의 모과나무 또한 내 것일 수 없다.

어디 가까운 시골 닷새장이라도 알아보고, 잘 익은 모과라도 한 소쿠리 사다가 한 구석에 놓아보면, 사람의 향기는 얼마쯤 잊을 수 있겠지 싶다. 좋은 계절에 머루 이야기나 모과 타령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요즘 세상이다. 아니, 사람의 향기를 그리워하는 것은, 유독 내 뇌가 지닌 환상 탓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