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돈의 천도재(薦度齋)

 

                                                                                             金龍福

거년 가을에 혼인하여 시집으로 떠난 딸아이의 시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 두어 달이 되어 가는가 싶더니, 7주일이 가까워온다고 했다. 그리하여 딸애는 시어머니께 이승을 떠나신 아버님 영가(靈駕)의 중유기(中有期)가 끝난다는 49일째 되는 날에라도 천도재를 올려드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여쭈었다 한다.

시집을 갔다고는 하나 시아버지가 몇 해 동안 병을 심하게 앓은 때문에 혼례식장에는 물론 폐백(幣帛) 마당에도 나오지 못했던 밭사돈이었다. 따라서 사돈네 쪽도 그러했겠지만 그 집안으로 딸을 보내는 나나 아내는 마음 한 구석이 빈 것 같은 서운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십여 년 전, 우리와 인연이 된 서울 큰며느리의 친정댁이나 청주의 작은며느리 쪽 사돈 양주 분들이 모두 해로하고 계셔서 애들의 든든한 기둥이 되고 있음은 물론, 어른들끼리도 간혹 안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들 노후의 건강을 걱정하는 덕담을 나누고 지내는 터이다. 거기에다 새로 인척이 될 막내딸의 새 사돈까지도 내외분이 다 생존해 계신다고 해서 이 또한 나의 쉽지 않은 '인연 복'이라 생각하고 흡족해 했었다.

더구나 새 사돈댁은 같은 도시에다 시내버스로 너덧 구간의 거리밖에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있고, 또 서로 비슷한 연배이기도 하여 애들 사이의 이야기가 잘 이루어지면 사돈들끼리도 자주 자리를 함께 하고 담소하는 교유가 기대되기도 했던 것이 혼담이 시작된 무렵의 생각이었다.

그 후 애들이 만나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딸애가 가지고 온 소식으로, 밭사돈께서 병환을 앓고 있어서 거동이 활발하지 못한 것은 물론 바깥출입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 사실, 당사자인 딸애는 이미 시아버지를 비롯한 시댁 형편을 대충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시댁의 놓여진 여건 모두를 수용한다는 자세여서, 우리 부부는 애가 모처럼 연분을 만났는가 싶어 그들 사이가 원만하게 진행되어 혼인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혼례식을 치르고 사돈댁 새 며느리가 되어 간 딸애의 신혼생활은 명랑하고 활기차 보이지는 않았다. 집안의 큰 어른이며 시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으니 우환이 끊일 사이 없었을 것이고, 흔히 말하는 며느리에 대한 시아버지의 잔잔한 정과 사랑을 우리 외동딸 현정이는 바랄 수 없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정감을 딸애에게 내색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이미 예상은 한 일이었고, 앞으로도 닥칠 예측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마음가짐을 자주 당부하기는 했지만, 애가 조금은 안쓰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이지 딸 네 자매 속에 한중간의 외아들 며느리로 들어가는 마당이면 시댁 식구들의 관심이 새사람에게 집중되기 마련일 것이고, 위아래로 네 시누이들의 예민한 눈길 속에서 어떻게 거동하고 적응해 갈는지가 은근히 걱정되는 것은 아비 된 나의 생리적인 노파심이었다. 하지만 평소 사물에 대한 긍정적인 안목과 자세, 웬만한 일은 속으로 삼키고 소화시킬 줄 아는 애였지만, 때로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만나면 할 말은 분명히 하고 넘어가는 성미를 아는지라, 늙은 애비의 걱정하는 마음이 더러 고개가 쳐드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병을 앓고 계시는 시아버지를 힘이 미치는 한 성심껏 수발해 드리고, 이해성 깊어 보이는 시모님의 마음을 헤아려가면서 최선을 다해 동기간의 우애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자연히 주변 사람들의 신뢰가 쌓여질 것이고, 그렇게 지내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점차 시댁의 가풍도 몸에 익어 자신이 설 공간도 조금씩은 넓어질 것 아니냐고 딸애가 집에 들를 때마다 귀가 닳도록 이르고 또 다독거렸다.

그렁저렁 무탈하게 지내기 반년이 넘어가는 어느 날, 밭사돈께서 급히 대학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아내와 나는 허겁지겁 병문안을 하기 위해 응급실로 달려갔다. 산소마스크로 씌워진 얼굴을 살필 수는 없었고, 여러 개의 링거 병과 주사바늘이 양 팔과 다리에 꽂힌 채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환자의 손을 만져보는 것이 새 사돈과의 처음 상면이었다.

그 후 20여 일 만에 끝내 밭사돈이 별세했다는 부음이 날아왔다. 나는 곧바로 시아버지의 복(服)을 입은 딸애와 사위를 문상하러 영안실을 찾았다. 비록 사돈 간이라는 인연이 맺어졌다고는 하나 정작 한자리에 앉아 인사를 나눌 기회조차 갖지 못한 처지여서, 영정 앞에 곡배(哭拜)를 올리면서도 고인에게나 사부인에게 정말 미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에 몇 차례 상면을 요청하였을 때 사부인이나 사위의 완곡한 만류가 있기는 하였지만, 간헐적으로 용태가 좋아져 주변 사람을 마음 놓게 하는 때가 있다고 했는데 그런 기회를 이용해 예고 없는 방문이라도 하여 만나는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그 후 장례 절차를 마치고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에 딸애는 시아버지가 운명한 날 이후의 날짜를 꼼꼼히 헤아리고 있었던가, 어느 날 집에 들러 시아버지의 천도재를 모셔드리고 싶은데 어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문의해 왔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라 딸아이의 이 말이 우선 놀라웠으며 한편으로는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잠시였다. 친정집 사람으로서 다른 일도 아닌 사돈가의 제례(祭禮) 절차의 하나일 수도 있는 이 일에 대해서 무어라 의견을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불교적인 생활환경에서 자란 딸애로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 49일 동안에는 매 7일마다 천도재를 정성껏 모셔드리는 것이 자식이나 남은 유족들이 행해야 할 당연한 도리이며 절차라고까지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딸애의 시댁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유교적인 선비문화의 가통이 맥맥이 흐르고 있는 가정에서 불교 의식인 천도재를 수용할 것인가가 우선 문제일 것이고, 또 시누이들이 이웃 종교의 독실한 교인들이라 하지 않는가. 사돈댁의 환경이 이러한지라 천도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입장이 아니라 여겨졌다.

더구나 서로 사돈 간의 인척이 된 지 한 해도 미처 못 된 어렵고 조심스러운 사이가 아니던가. 따라서 나는 이 일을 만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딸애는 한 가지 가능성이 보인다고 했다. 즉, 시어머니께서 사월 초파일이면 원찰로 삼고 있는 한 절에 가서 가족 수대로 정성껏 연등을 켜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시어머니께 재를 올려드리자고 힘주어 말씀드렸다는 것.

사실 정씨 댁 며느리가 된 딸 현정이는 그 댁 시아버지의 천도재에 관해서는 놀랍도록 적극적이었다. 아내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로 "49 천도재는 이승에 살아남은 자식들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효행인데…"라고 독백처럼 이야기하더라는 말을 듣고, 나는 현정이의 신념에 가까운 생각이 가상하게 여겨지게 되었고, 그 일을 만류한다는 생각에서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천도재를 하루 앞둔 날 집에 들른 딸과 사위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너희 선친께서는 평생 동안 한 식솔을 부양하랴, 자녀들 교육시키고, 또 서로 맞는 연분을 찾아 혼인시켜 살림차려 보내시느라 허리가 휘도록 고생하셨다고 본다. 그런 어른께서 만년에 이르러서는 당신이 살아온 일생을 되돌아보실 여유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이승을 떠나셨다고 본다. 이제 그분의 영혼을 맑게 해드리고 보다 나은 내생으로 인도해 드리기 위한 천도재를 모시고자 하는 너희의 마음에 나는 상당히 감동하고 있다. 고맙구나. 한 가족이나 자식이 아니더라도 고인과 인연이 닿은 사람이면 이런 재에는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해 드리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고 미풍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49일 동안 매 주마다 재를 모셔드리지 못했을망정 마지막 날에라도 그분을 부처님 앞에 오시게 해서 법문을 들려드리려는 너희의 효성을 칭찬하고 싶구나. 너희가 지극하고 순수한 마음이 되어 정성껏 기도드린다면 비록 중유 기간 내내 줄곧 기도드린 것 못지않게 맑아진 그분의 영혼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옆길을 기웃거리거나 삼악도(三惡道)의 나쁜 유혹에 빠져들지 않으시리라 믿는다. 그리하여 최선의 길을 택하여서 궁극에는 극락왕생 하시리라 나는 믿는다. 정성을 다해 기도드리기 바란다."

 

재를 모시고 귀가하는 사위의 차에는 사부인과 딸애 그리고 아내가 앉아서, 친지의 아들 혼례식장에서 나오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재를 모시는 그 시간에 정신없이 두어 군데 예식장을 뛰어다녀야 했기 때문에 재에 동참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부인에게 인사하면서 운전대 옆자리에 앉았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모두들 밝은 표정들이었다. 더구나 현정이 시누이들 내외가 사찰에서 올린 재에 동참하여 열심히 기도드리고 갔다고 말하는 사부인도 무척 흐뭇해 보였다.

문득, 지난해에 열반하신 청화(淸華)선사께서 설하신 법문 한 부분이 머리에 떠올라 조용히 두 손이 모아졌다.

'육신을 떠난 영가(靈駕)도 분명히 중생입니다. 다만 무색중생(無色衆生)일 따름이지요. 그 무색중생도 제도(濟度)되어야 마땅합니다.'

 

김용복

<수필공원>으로 천료(90년). 현대수필문학상 수상(2000년).

저서 『碧霞集』, 『魚登山 물소리』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