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년을 마치며

 

                                                                                           구양근

햇볕이 유별나게 좋은 여름날 오전, 나는 낯선 이국땅에서 혼자 지방공원의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이 산을 꼭 올라야 할 일이 있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오를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안식년 미국생활의 일 년을 마감하고 이제 일주일 남짓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들딸은 벌써 계절 학기를 들어야 한다고 귀국하였고, 나 혼자 남아 있다. 오늘은 내 짐과 차를 붙일 통운회사에서 내 숙소를 방문할 날이다. 오전 중에만 차를 쓰면 오후부터는 다시 차를 몰고 나갈 수 없다. 그래서 먼저 차로 갈 수 있는 이곳을 찾은 것이다.

이곳 브라이언 지방공원은 내가 개발한 상당히 좋은 하이킹 겸 등산 코스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운전을 배웠기 때문에 운전이 무척이나 서툴다. 그러나 서툴다는 핑계만 대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기를 쓰고 차를 몰고 가까운 곳을 다니다가 발견한 곳이다.

그 날도 아예 표를 받는 사람마저 없고 주차장에는 네댓 대의 차만 주차해 있고, 어떤 멋쟁이 아가씨 둘이 승마를 하려고 차에서 말을 내려 안장을 채우고 있었다.

작은 산들을 이은 능선에 차 한 대쯤이 다닐 만한 넓이로 길이 난 한나절의 등산길이다. 이 근방에서 가장 높다는 디아브로 산이 손에 잡힐 듯이 다가왔고, 작은 연봉이 보기 좋게 포개져 긴 병풍을 이루었다. 버클리 쪽을 바라보니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가 다소곳이 누워서 소곤대고 있다. 나는 살찐 흙길을 발이 시도록 걸었다.

산은 곳곳에 각자의 목장 한계 표시로 짐승이 뛰어넘지 못할 정도의 철사 줄이 처져 있고, 각 문에는 예쁜 청동 고리가 걸려 있다. 등산객은 걸어놓은 고리를 제치고 들어가서 다시 그 고리를 걸어놓고 걸으면 된다. 어느 상봉에 이르자 처음으로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곳이 경치의 절정을 이루는 곳이었다. 안개 낀 브라이언은 참으로 선경이다. 산을 내려오니 방목하는 소 떼가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이방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묵직한 스텝으로 손님을 환영한다.

이 코스가 하도 좋아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였다. 포스탁으로 온 정 선생과도 같이 올랐고, 아침 운동에서 만난 북경에서 온 리우 선생과 홍콩에서 온 리 소저(小姐)와 셋이서 오르기도 하였다.

 

나는 혼자 산을 오르다 말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이유인지 가슴이 메어왔기 때문이다. 웬일일까 하고 생각해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내가 이곳에 정(情)을 준 것이다. 인생은 고해(苦海)라 했던가. 어디에도 함부로 정을 주어서는 안 되는데 이역만리에 또 정을 묻고 가려니 그랬던 것이다.

산의 초입까지 오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오전 중에 가볼 곳을 어서 돌아야 한다. 나는 다시 차를 몰아 한국인이 경영하는 코리아나 플라자에 들려 일주일치 밑반찬이며 김치를 샀다. 다시 급히 80번 프리웨이를 타고 인엔아웃(In-n-Out) 패스트 푸드점에 들려 햄버거에 큰 잔 콜라를 들고 점심 식사를 때웠다. 일년 만에 벌써 패스트 푸드에 콜라가 먹고 싶어졌으니 사람은 참으로 간사한 동물인가 보다.

숙소에 들어오니 벌써 통운회사의 남미계 일꾼이 둘이나 기다리고 있다. 차와 짐을 부치고 또 침대를 사겠다는 사람까지 와서, 불과 한 시간 만에 집안이 휑해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제는 걸어서 알바니 힐을 올랐다. 이 언덕은 아침마다 내가 오르던 나만의 명상의 장소이다. 또 해변의 오솔길도 걸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많이 산책하던 곳이다.

이제 됐다. 일주일 후에 나는 가벼운 트렁크 하나만 들고 비행기를 타면 된다.

이번 나의 안식년 성과는 괜찮은 것 같다. 내가 쓴 것만 해도 에세이 10편, 단편소설 1편, 번역 2권, 논문 1편이다.

그리고 이곳 동아시아 도서실에서 한국 책을 빌려서 평소에 못 읽었던 소설을 실컷 읽었다. 장편으로 김경옥의 『불타는 제국』(3권), 채길순의 『동트는 산맥』(7권)을 읽었고, 황석영의 『장길산』 10권짜리를 5권까지 읽었다. 또 조정래의 『한강』은 1권만 읽었다. 조정래 작품은 전에도 『태백산맥』을 1권만 읽더니 이번에도 그렇게 그쳤다. 또 최인호의 『타인의 방』, 박태원의 『천변풍경』 등 단편도 많이 읽었다.

하여튼 많은 수확이다. 아들딸에게 대학 부속어학원에서 1년간 어학 연수를 시켰고, 나도 성인학교(Adult School)에서 무료로 6개월간 영어회화를 들었다. YWCA에서 봉사하는 일주일에 한 시간의 영어실습(Action in English)도 일 년을 계속하였다. 또 나는 이곳저곳 특강도 담당했다. 특히 인문대 드위넬리 홀의 특강은 동아 닷컴에 올라 댓글이 117개나 달린 네티즌들의 토론장이 되기도 하였다. 또 무엇보다도 한국의 내 생활에서는 꿈도 꾸어볼 수 없던 자동차 운전과 골프까지 제법 공을 날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어찌 혁명이 아니랴.

충분히 충전되었다. 이제부터는 현실로 돌아가서 시들을 뻔하였던 심신을 곧추세우고 다시 한 번 힘찬 도약을 해야겠다. 밖에서는 바트(Bart)가 쇳소리를 흩날리며 베이(Bay) 지역을 질주한다. 숙소로 들어오는 셔틀버스가 은은히 땅을 진동한다. 나는 불현듯 가슴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