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그 너머에는

 

                                                                                           이경은

배 안에서 태어나 배 안에서 한 평생을 살다가 간 피아니스트가 있다. 평생에 딱 한 번 배 안에 탄 여자한테 첫눈에 반해 배를 내려보고자 했으나, 그는 결국 내리지 못한다. 배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자기의 삶을 만들어 온 그로서는, 눈앞에 펼쳐진 수천 갈래의 길 앞에서 자기의 인생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해 포기하고 만다. 88건의 피아노 건반 위에서만 그는 자유자재로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듯이 그의 인생은 '배'라는 한정된 틀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미 그에겐 배가 인생이고, 그 자신이 바로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또 하나의 배이다.

결국 그는 배의 선체가 낡아 더 이상 배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폭파 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 배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스스로 결정한다. 배와 함께 그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미국 이민자가 버리고 가 이름도 없이 태어나 뱃사람들에게 그저 '나인틴헌드래드(1900년)'라고 불리던 그의 일생은 배 안에서 시작해 배 안이라는 공간 속에서 끝이 난다. 한정된 공간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가지고 살던 피아니스트. 가상의 공간에서 현실의 공간으로 간격 없이 다가온 아름다움에 한참이나 빠졌다.

'피아니스트의 전설' ─ 오랜만에 감명 깊게 본 영화이다.

 

모차르트라는 음악가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교과서나 음반 속의 실제 모차르트의 얼굴보다 '아마데우스'란 영화 속의 모차르트를 더 깊이 기억한다. 그의 이미지는 그 역할을 한 배우에게로 한정되어 있다. 내 머리 속의 공간은 이미 영상이 만들어낸 가상의 이미지에 고정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점령된 공간을 오스트리아에 가서 조금이나마 열 수 있었다.

도시 한가운데로 긴 강이 흐르고, 그 위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다리와 산  언덕 위로 커다란 성이 수호신처럼 서 있는 찰스부르크. 도시 전체 구석구석마다 음악이 흥청거리는 빈. 그 거리를 오래 전 모차르트는 악상을 떠올리며 걸어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기다란 겉옷을 질질 끌며 거리를 방황하던 영화 속 모차르트의 칙칙한 모습은 그곳에선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만큼의 사실성을 가지고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모차르트 생가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그는 오히려 가슴을 울렁거리게 할 만큼 눈물겹게 아름답다.

특히 모차르트의 머리카락은 나에게 갑작스런 공간의 동질화를 가져다준다. 한 움큼의 노란 머리카락은 그가 이제 더 이상 관념 속의 천재적인 음악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교과서 속의 곰팡내 나는 외울 대상도 아니고, 아마데우스 속의 인물도 아니다. 다만 찰스부르크 속의 인물이다. 그가 태어난 방, 침대, 도자기 난로, 그의 음악성을 알아낸 아버지, 여동생의 그림에서 나는 그를 온몸으로 느낀다. 순간 우리 사이엔 공간의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내가 한 곳에 서 있다. 나는 그와 함께 걷고 서로를 느낀다.

신통력이 없는 나도 같은 공간에 서니 신통이 생기는 모양이다. 흐르는 강물 속에 내가 흘러가고, 모차르트가 흘러가고, 시간이 흘러간다. 어느새 우리는 그 강물이 되어 시간의 공간을 함께 흘러가 버린다. 강은 말없이 다 받아들인다.

 

현대의 우주론이 성공을 거두면서 사람들은 영혼과 정신의 공간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발을 딛는 순간 우리의 마음에서 달 속의 계수나무와 옥토끼를 빼앗겼듯이, 우주 저 너머에 초월적인 존재와 정신이 있을 거라는 믿음은 공간의 동질화 속에서 추방되기 시작했다. 마치 제로섬 게임이라도 하듯 물질 공간이 무한으로 확장되어 버린 만큼 영혼과 정신의 공간은 줄어들고 말았다. 중세의 우주에서 영혼의 장소는 항상 '공간, 그 너머'였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점점 그 너머를 바라보는 일이 줄어드는 것만 같다.

현실이 우리들의 삶의 발목을 잡고, 입 속의 밥 한 숟가락이 너무 급한 공간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난 여름 극성스러운 더위는 아파트라는 공간 속에 누워 있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한번 읽어 보려고 마음먹었던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말 그대로 마의 산이 되어 넘질 못했다. 같은 페이지만 며칠을 뒤적이다 나는 책장을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올림픽과 비디오의 공간 속으로 도망갔다.

별 생각 없이 누워서 눈만 돌리면 되는 일이 컴퓨터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짜거나 책 속에 코를 파묻는 일보다 쉬웠다.

재수를 하는 아들이 보낼 지루하고 긴 여름을 나는 새벽까지 함께 있는 것으로 대신했다. 어차피 책을 못 읽을 바에야 영화라도 대신 봐 두는 것이 계산상으로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영화를 보고 나면 새벽 3시쯤이 되니, 같이 밤을 새주는 것도 어미로서 할 일을 조금 했다는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 머리가 아파오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왜 그런가 한참을 생각했다. 단지 늦은 취침과 적은 수면 탓만은 아니다. 나는 영상이라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미지 속에 서서히 네모난 공간 속의 수인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빈 공간 속에서 생각하지도 상상하지도 않는다. 공간 너머의 세계를 넘보지도 않고 달려가려 하지도 않는다. 덥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아파트라는 현실적 공간에 누워 사고의 공간을 닫아버린다. 단지 오감으로 느끼는 본능만이 그 한여름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의 어지러움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젠 제법 바람이 선선하다. 나는 그 바람에 머리를 들이민다. 더러 얼룩은 남아도 깨끗해진 느낌이다. 돌아오는 계절에는 공간, 그 너머로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다. 이제 그곳에 더 이상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해도, 우리들이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한 아름다운 영혼과 정신의 세계는 생생히 살아 있을 것이다. 마의 산을 넘어서 다만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어 이 도시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

 

 

<계간 수필>로 등단(98년). 방송 작가. 현재 라디오 드라마 'KBS 무대' 집필중.

수필집 『내 안의 길』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