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빛, 제자리

 

                                                                                        김금주

"우아! 별이다……."

버스가 정차한 뒤 비몽사몽간에 들은 소리다. 급하게 점퍼를 걸치고 계단을 내려선다. 그 순간 발은 허공을 향해 '꽈당' 나뒹군다. 꿈인가 싶은데 얼굴을 스치는 찬바람에 정신이 맑아진다. 일행 중 누군가가 얼른 일으켜준다. 바지가 헐고 무릎에 피가 배어 있다. 하지만 주먹만한 별들이 와르르 웃으며 환호를 보내지 않는가. 까짓 무어 대수랴 촘촘히 박힌 별들이 마구 쏟아져내린다. 황홀함에서 가까스로 깨어나 보니 다리가 욱신댄다. 꽤 후한 관람료를 낸 듯하여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별이 크게 빛을 발하는 만큼 공기는 투명하다. 짜릿한 냉기가 살갗을 파고든다. 추위가 한 걸음 앞서는 산중 날씨를 가늠하지 못해 오소소 떨며 짊어진 배낭의 온기에 의지한다. 멀리에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다른 팀의 행렬이 보인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두어 시간을 지나야 하는데 이 시각 방황하듯 모여든 우리들은 분명, 헛헛함을 채울 무언가를 찾아 나선 순례자들인 게다.

몇 번의 야간산행 경험으로 이제 어둠은 낯설지 않지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안다. 암흑 속에서 나를 이끄는 것은 등불을 켠 듯 도열한 저 빛, 헤드 랜턴의 행렬이다.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산길로 접어든다. 추위가 빠르게 와서인지 발 밑엔 나뭇잎이 수북하다. 긴 겨울을 어찌 견디려고 벌써 옷을 다 벗어던진 것일까. 훌훌 털어 보낼 것을 보내고 남은 것은 남는 깔끔한 조락,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별빛들, 유성의 흐름, 가지 끝에 피어오른 절대 고독의 빛, 냉기는 귓불을 치는데 가슴에선 얼얼한 감동이 솟구친다. 결코 이 밤, 이 공기, 나를 흔들고 있는 이 냉염(冷艶)을 잊지 못하리라.

사각사각 살얼음이 깨지는 발소리와 뿌옇게 내뿜는 거친 호흡만이 내가 거기 있음을 말해 줄 뿐 사위는 고요하다.

서둘러 올라온 까닭에 노인봉은 깜깜한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소황병산을 향하는 길은 키 낮은 나무들이 단단해 보이고 종아리를 스치는 잡목에서도 탱탱한 탄력이 느껴진다. 높은 산에서 혹한을 견디려면 스스로 지녀야 할 강인함이 아닌가. 마침내 낮게 엎드린 능선 사이를 비집고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잠시 후 선홍빛 띠를 두른 동녘 하늘에 희망의 불꽃이 활기차게 작동을 한다. 이제 하루 동안의 혼돈과 갈등은 어제가 되어 완전히 묻히었다. 우리는 다시 밝아오는 새 날을 맞고 새 공기와 호흡하는 것이다. 문득 구상 시인이 병상에서 쓴 시 '오늘'이 떠오른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중략)'

 

병상에 있는 사람의 하루는 정녕 눈부시리라. 그렇게 피어오른 태양은 만휘군상 위에 축포처럼 뿌려진다. 내 어깨에도 살포시 내려앉은 햇살이 어버이의 손길인 양 따스하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에는 은빛 평화가 일렁인다. 광활한 목장의 소와 양들은 다 어디 가고 키 큰 소나무가 한가롭게 주인 없는 집을 지키고 있다.

 

구룡연계곡으로 향하는 능선엔 유난히 소나무가 많다. 수령이 몇백 년은 됨직한 우람한 나무들의 기상이 활기차 보인다. 군데군데 물기 마른 고사목이 옆의 작은 나무들을 감싸고 있어 눈길을 끈다. 죽어서도 제 몫을 하고 있음인가. 더러 길을 막고 쓰러져 있는 웅장한 나무들도 나그네들에게 잠시의 쉼터가 되어준다. 그 둥치 위에 앉아 바라본 고사목은 모두가 결이 비비 꼬여 있다. 북풍한설의 휘몰아침을 묵묵히 받으며 달팽이처럼 꼬이다가 끝내는 쓰러졌으리라. 까실한 나무 결을 만져보니 촉감이 의외로 부드럽고 곱다.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체념과 빛과 순응의 결이 이런 것일까.

하산하는 길에는 선발대가 길을 잘못 들어 험한 계곡으로 내려섰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비경과 만나 일행들은 일제히 탄성을 지른다. 사람의 눈길이 직접 닿지 않는 곳에서도 계절은 힘차게 타오르고 있다. 햇살과 바람의 변화에 충실한 단풍잎과 바삭해진 잡풀들은 지나는 이들의 발에 힘을 실어준다. 머지않아 한 줌 흙으로 돌아갈 것들의 나직한 속삭임이 들린다.

12시간의 행보를 마치고 드디어 구룡폭포에 도착한다. 아홉 개의 웅덩이로 릴레이식 물이 흐른다. 마지막엔 수직으로 급강하하는 센 줄기에 전율한다. 바라보는 눈길도 그 힘에 휘말려버릴 것 같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폭포는 공포스러울 만치 단호하다.

 

오대산의 청학동이라 불리는 구룡폭포는 깎아지른 웅장한 백색 바위들이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아찔한 절경을 보여준다. 늦가을 농염한 빛의 단풍들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미루어 상상해 본 겨울 풍경에서는 황량한 바람 냄새가 난다. 제 속내를 아무 조건 없이 다 드러낸 말간 계곡 물에도 하염없이 가슴이 시리다. 실속 없이 마냥 퍼주기만 하는 착한 사람들의 심성을 보는 듯해서다. 그 사람들의 맑고 서러운 눈물 같아서다.

 

 

<월간 문학> 신인상 당선(95년). 제2회 대표에세이 문학상 수상.

수필집 『사랑을 점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