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아카데미 제4회 강좌 요지>

 

사회칼럼과 사회수필

 

                                                                                        이정림

1. 사회수필의 필요성

 

우리의 수필은 이제 분명한 성격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몽테뉴 식의 관념적인 수필도 아니고 프랜시스 베이컨 식의 중수필도 아니다. 작고 사사로운 신변의 이야기들을 소재로 삼았던 찰스 램의 경수필(輕隨筆)과 그 성격을 같이 하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근접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은연중에 한국 수필의 성격이 정착됨으로써 우리 수필계에는 자연스럽게 서정수필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신변적인 소재를 다루는 데 있어 서정수필만큼 적당한 형식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서정수필은 우리의 정서를 풍부하게 하면서 독자들에게 친근감과 호소력을 준다. 어떤 성격의 수필도 서정수필의 이와 같은 친근감과 호소력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서정수필은 또한 시대를 초월한 긴 생명력을 지닌다. 서정수필이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시대성을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백 년 전의 사랑 이야기나 오늘날의 사랑 이야기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눈 오는 날, 천장을 쳐다보며 "이 밤에 쥐는 나무를 깎고 나는 가슴을 깎는다."(노천명, 『설야산책』 중에서)는 절절한 고독의 감정은 1940년대의 노천명이나 2000년대에 사는 우리의 감정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정수필의 작품세계는 자연히 개인의 내면적인 문제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수필이란 장르는 일정한 형식이 없는 대신, 여러 형식의 글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다양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김진섭(金晉燮)도 "수필은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는 용기(容器)"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서정수필은 이런 무한한 포용성을 사실상 차단하고 제한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어쩌면 서정수필이 안고 있는 숙명적인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수필평론가들은 수필인들 스스로 좁혀놓은 수필의 세계에서 과감히 탈출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끊임없이 제기하여 왔다. 어느 평론가는 심지어 수필도 논설문처럼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수필문단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지만, 그 역시 끝내 개인사와 주관적인 정서에 치중하는 서정수필의 영역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론은 그렇게 혁신적으로 내세웠으나, 그 자신은 왜 그 이론에 부합되는 수필을 쓰지 못했을까? 그것은 서정수필이어야만 문예성을 지닌다는 고정관념에서 그 역시 벗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법론에 좌우되는 문제이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협소해진 한국 수필의 성격에서 탈피할 수 있는 방안으로 나는 일찍이 사회수필을 권장해 왔다. 그것은 우리 수필가들도 자신이 처한 시대의 일원으로서 그 사회가 안고 있는 공동의 관심사와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하며, 나아가서는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해야 한다는 나의 수필관에 기초한 것이었다.

한 편의 수필 속에는 작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시대적인 배경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단순한 배경적 요소에는 특별한 사회의식이 없다. 따라서 이런 소극적인 차원이 아니라 적극적인 차원에서 수필가들도 사회문제를 다루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회문제를 다루되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 하는 방법론이 될 것이다. 수필은 문학이지만, 칼럼은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수필이 사회칼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문제를 다루되 문예성을 잃지 않는 방법을 먼저 터득하지 않고서는 사회수필은 시도하기 어렵다. 사회의식은 지녔으되 사회수필을 시도하지 못하는 가장 큰 난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양하(李敭河)도 수필 제1기에는 서정적이고 개인적인 경수필만을 썼다. 어쩌면 그도 정지용처럼 일제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순수수필에만 매달렸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그는 서정수필을 버리고 중수필과 잡문에만 주력했다. '이상향(理想鄕)을 그리는 낭만주의가 청소년의 전유물인 데 반하여 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현실주의자가 장년(壯年) 이후의 귀착점인 일반적 경향에서 그 역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양하 수필의 제2기는 '현실을 직시하는 산문적 잡문의 시기'(유병석, 『이양하의 수필』에서)였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양하의 사회수필은 실패했다. 개인수필에서는 지나친 미문과 외국 문장식 표현이 결점으로 지적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수필에서는 사회의식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성과 문학성의 접목은 수필의 세계를 넓히고자 하는 수필가들에게 있어 풀어야 할 무거운 과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제만 풀 수 있다면 사회수필은 문예성을 지니게 될 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생명력도 지닐 수가 있게 된다.

시체에 달려드는 쇠파리들을 굶주린 가엾은 백성으로 비유해 세상을 날카롭게 비판한 정약용(丁若鏞)의 '파리를 조문하는 글'이라든가, 엄동설한에 모두 얼어 죽은 줄로만 알았던 개구리가 바위 틈에 한 마리 살아 있음을 보고, 일제의 폭정에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조선 백성의 항일민족사상을 풍유적(諷喩的)으로 표현한 김교신(金敎臣)의 '조와(弔蛙)'는 그 시대의 사회상을 주제로 한 수필이지만 서정수필 못지않은 생명력을 지니고 오늘에까지 애독되고 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연구해 본다면, 사회수필의 방법론은 자연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2. 수필과 칼럼의 상이점

 

① 정서와 논리

어떠한 형식을 빌리듯 문학은 모두 개인의 정서를 기반으로 한다. 그 정서는 비록 개인의 감정에서 출발하나 타인의 정서에까지 울림의 파장을 전달한다. 그럼으로 사회수필도 이러한 정서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의식을 전개해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사회칼럼에는 이런 정서가 개입되지 않는다. 정서보다는 논리가 앞서고, 주관적인 느낌보다는 객관적인 논거(論據)에 치중하는 것이 칼럼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② 상징성과 구체성

상징이란 추상적인 사물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하얀 웨딩드레스는 곧 '순결'을 상징한다. 이런 상징과 비유는 시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수필은 뜻의 전달에 주안점을 두는 산문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문예적인 산문이다. 따라서 사회수필에서도 이런 상징성은 필요하다. 사회수필은 다루고자 하는 사회문제를 먼저 상징적으로 또는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반면에, 사회칼럼은 매우 구체적으로 또한 직설적으로 접근한다. 사회수필에서 상징은 구체적인 것을 오히려 추상화시킴으로써 주제의 전달에 암시와 여운을 던져주는 효과를 가져오며, 따라서 글에 문예성을 지니게 한다.

 

③ 우유체(優柔體)와 강건체(强健體)

수필과 칼럼의 상이점은 문체와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사회칼럼의 문체는 강하고 설명적이다. 독자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표현도 직설적이다. 그러나 사회수필의 문체는 부드럽고 온유하다. 강한 메시지도 부드러운 문장으로 감싸고, 설득시키려는 조급성보다는 여운으로써 공감성을 유도해 낸다. 칼럼의 문장에는 수식이 없지만, 수필의 문장에는 비유와 수사가 동원된다. 강하게 설득시키려는 칼럼에서는 부드러운 문장이 비효과적인 것과 같이, 마음에 호소하는 수필에서는 강한 문장이 적합지 않다. 이것이 사회수필과 사회칼럼의 문장이 같을 수 없는 이유이다.

 

3. 예문으로 본 사회칼럼과 사회수필

 

<예문1>은 사랑의 나눔을 주제로 한 글이다. 사회칼럼과 사회수필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예문1-1> 몸보시(布施) / 송영언(동아일보 논설위원)

<예문1-2> 사랑은 돌고 돌아 / 이정림

 

<예문2>는 간첩죄로 미 연방교도소에서 복역한 로버트 김에 대하여 각각 사회칼럼과 사회수필로 쓴 글이다.

<예문2-1> 로버트 金 / 송영언(동아일보 논설위원)

<예문2-2> 로버트 김의 외로움 / 이정림(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