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朴在植

내가 위치한 곳은 터널 속이었다. 그 터널을 따라 남쪽으로 빠져나가야 내가 살 수 있는 피난처가 있다. 탱크를 앞세우고 노도처럼 밀려오는 적군을 피해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남쪽으로 뚫린 터널 속을 내닫고 있었다. 암벽으로 에워싸인 터널 길은 캄캄하고 멀기만 하다. 미구에 뒤쫓아오는 적군에게 내가 붙들릴 것은 각박한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영문인가. 반대쪽에서 헐떡거리며 달려온 웬 사나이가 "굴 저쪽도 벌써 놈들이 다 장악해 버렸어. 되돌아 나가 다른 길을 찾아야 하겠어" 하고는 왔던 길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허겁지겁 사라져가는 뒷모습이 까까머리 중학생인 아들놈이다.

"안 돼! 그쪽은 탱크가 오고 있어."

 

다급하게 내지른 소리에 소스라쳐 잠이 깼다. 꿈이었다.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요즘은 깨고 나면 무슨 꿈을 꾸었는지조차 아리송한 것이 꿈자리인데, 오늘 따라 등줄기에 식은땀이 뱄을 만큼 줄거리와 형상이 너무도 뚜렷하고 생생한 악몽이었다. 꿈이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잠시 가슴을 쓸고 간 자리에 악몽의 끝자락이 슬그머니 잠자던 나의 위기의식을 들쑤시며 정신이 멀뚱해 왔다.

프로이트의 해석에 의하면 꿈은 잠재의식의 상징화라고 한다. 그렇다면 방금 꾼 악몽은 내가 6·25의 체감을 통해 잠재한 위기의식이 한 술을 더 뜬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상황으로 상징화되어 나타난 것이 분명할 듯하다.

왜일까? 6·25를 기점으로 '꼴통'의 뇌리에 판박힌 이른바 '냉전 이데올로기'가 요즘 돌아가고 있는 정국의 낌새에서 바야흐로 '대한민국'이라는 큰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위기감을 절박하게 자아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침몰한다는 것은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에 있는 자유 민주 체제의 우리나라가 무지막지한 북쪽의 공산 정권에 의해 마침내 통일된다는 얘기이다. 우리 민족의 숙원이 통일일진대 그것은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 아니냐"고 할 사람이 있을 터이다. 실상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득세하여 판을 짜가고 있는 것이 실재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의 형편이기도 하다.

나는 작년 이맘때, '386'이라는 글(『선수필』 2003년 겨울호)에서 금년 봄에 치러질 17대 국회의원 총선을 통해 이른바 '386세대'의 투사들이 제도권의 정치 표면에 대거 진출할 것이라고 점친 바가 있었다. 왜냐면 우리 정계의 고질적인 정쟁 행태와 부패 구조에 싫증을 느낀 국민(특히 젊은 세대)의 대다수가 새 정치의 기수로 '민주화와 개혁'을 앞세워 권위주의 정권과 맞서 싸운 '386' 투사들에게 거는 기대와 여망이 매우 컸던 것이 그 무렵의 사회적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대교체의 섭리와 맞물리는 필지의 현상이기에 적중할 수밖에 없는 예측이었을 뿐이다.

미상불 총선 결과는 '386'이 주력을 이룬 여당이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대승으로 끝났다. 남은 문제는 새로 등장한 '386'의 젊은 일꾼들이 국민의 여망을 좇아 구시대(舊時代)의 부패 구조를 과감히 '개혁'하고 국헌의 기본이 되는 자유민주주의를 한층 신장시키는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는 일일 뿐일 터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인 괴변일까? 그 '386'의 여당이 하고 많은 일들을 제쳐놓고 '개혁과 민주화'의 첫 장으로 내어놓고 밀어붙이는 사업이 '국가보안법 폐지'가 아닌가. 현역의 대한민국 대통령까지 '악법'으로 규정하고 폐지해야 한다고 한 국가보안법이란 어떤 법인가? 그것은 광복 후 60년 동안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세습제의 북한 공산독재 집단이 시종 일관 획책하고 있는 '꿈에도 소원'인 적화통일을 남쪽의 자유민주 체제가 막고 있는 최후의 보루와 같은 법이 아닌가? 이것을 없앤다는 것은 바로 북쪽의 적화통일을 받아들이기 위해 문을 열어놓자고 하는 발상 이외의 아무런 뜻이 없는 불장난이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렇잖아도 각계각층에 세를 뻗힌 친북분자들이 '민족 화합과 자주 통일'이라는 허울을 쓰고 적화통일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온갖 짓거리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이 불장난을 좋게 해석하면 고착 상태에 있는 남북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우리부터 그 장애가 되는 빗장을 풀어놓는 고육책(苦肉策)이라 하겠는데, 이것은 소 떼를 몰아주고 쌀과 돈을 퍼주는 '햇볕정책'의 당근과는 사뭇 경우가 다른 위험천만의 착각에 불과하다. 왜냐면 북쪽에는 헌법보다 앞서는 '노동당 규약'에 남한의 적화통일 혁명에 대한 불요불굴의 의지가 철칙으로 명문화되어 있고, 이 사업을 반대하거나 방해한 자를 극형에 처하는 무시무시한 현행 형법을 고수하여 한 치의 양보 없이 대화에 임하는 것이 그들의 불변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국보법'의 폐지를 서두르는 사람들이 이런 사정을 알고 하는 일인지 모르고 하는 짓인지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다만 그 칼자루를 쥐고 앞장 선 멤버가 대법원에 의해 이적 단체로 규정된 '한총련(韓總聯)'의 전신인 '전대협(全大協)' 출신의 의원들이라고 하니 '알고 하는 노릇'이 분명하리라 짐작이 될 뿐이다.

알다시피 '전대협'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대학생들이 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 편승하여 조직한 학원 내의 친북단체이다. 이들은 학원 내에서 각종의 서클 활동을 통해 많은 학생들에게 '친북 반미' 사상을 의식화시키는 작업을 활발히 벌여 오늘의 난국을 초치하는 데 남상의 구실을 한 주역 군이기도 하다. 그들이 의식화한 이념의 알맹이는 '대한민국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세운 미제(美帝)의 괴뢰 정권이므로 마땅히 타도되어야 하고, 우리 민족의 정통 정부는 북쪽에 있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북쪽의 주장을 판박은 내용으로 요약된다. 그러니 '국보법'의 폐지와 더불어 서둘러 추진하고 있는 이른바 '친일 등 과거사 청산법'도 이 주장과 맥을 잇는 저의의 발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국보법'의 폐지는 80%가 넘는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수당의 힘에 의해 기어이 강행될 전망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한 해에 3백만의 인민을 굶겨 죽여가며 마련한 북쪽의 막강한 군사력의 남침 없이도 대한민국의 침몰은 시간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배가 침몰하면 그 안에 탄 국민들과 사랑하는 후손들은 지금 북한 동포들이 생지옥의 고통을 겪고 있는 천하무이(天下無二)의 비정한 체제의 바다 속에 빠져 하릴없이 허우적대는 신세가 될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 불을 보듯 명약한 귀취의 전망이 자아내는 위기의식에 쫓겨 내가 꾼 악몽의 캄캄한 굴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 요즘의 나의 딱한 심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