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대가에서 ─ 2003년 12월

 

                                                                                          南基樹

1.

북촌(北村)으로 내려와 있다. 이제 달소수가 되었다. 하늘과 바다와 검은 돌들을 싫증내는 법 없이 맞고 보내고 있다. 하늘의 구름과 해변의 검은 돌처럼 한동안 서로 거리를 좁혀 보지만 다시 넓혀지는 것이 사물들 사이에 닮은 점이기도 하다. 이름 없는 물가에는 이름 없는 존재로 환원되어 있으니 놓여나 있다 하겠다. 지복의 나날이 아닐 수 없다.

 

대문 앞에 들 물이 가득히 못을 이루었다.

뭍에서 바다 쪽으로 내밀려 있는 이곳 암반지대는 오래 전부터 동편에 물길이 나 있다. 물은 하루에 두 번씩 이곳을 섬처럼 돌아들고, 든 물은 방파제로 길게 쌓아 놓은 검은 돌무더기 안쪽의 서편 끝에서 뭍을 경계로 되돌아난다.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길을 내던 때에도 동편의 이 물길은 막지 않고 굴의 모양으로 길 아래에 열어두었다.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로, 우리가 북촌대가北村大家로 옮겨 들기 전에, 사람들은 길의 이쪽 끝을 이어내고 물길의 가운데를 정남으로 가로질러서 건너편 뭍으로 연결했다. 대문 앞에서 시작하여 큰 돌을 쌓아 낸 이 길은 돌 틈으로 가늘게 물길이 살아 있어 들 물일 때는 대문 앞 좌우에 외관상으로 지금처럼 못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못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노면에 이르기까지 물이 높아진다. 어룽거리는 하늘빛이 짙은 물 빛깔과 어울려서 노면에 넘칠넘칠 하는 때면 집 앞 주위는 하늘로 솟아오른 듯 환하고 사방으로 번져나는 느낌을 준다. 그런 때면 누구라도 불러내어 충만해진 가슴을 전하고 싶어진다. 허나 그런 순간의 충만감은 뉘 있어 함께 나눌 것인가……. 홀로 옥상에 올라 물이 차오른 사방을 둘러보며 벅찬 가슴으로 서 있을 때, 마침 아침 나절이나 오후로 바람까지 있는 날이면 노면 위로 날리는 물보라에는 무지개가 비껴 따르고, 길은 축축이 젖는다.

 

어제도 그제도 비를 뿌리고 지나가는 구름이 하늘을 가득히 덮고 있었다. 구름이 머리 위를 지나서 수평선 저쪽 끝으로 부채처럼 모양을 지어가는 움직임은 보기에 좋다. 한라산을 품고 움직이지 않던 구름도 기슭으로 흘러내리며 무리무리 비를 뿌렸다. 이런 모습에는 마음도 덩달아 풀어지고는 한다.

덩어리진 구름들이 서로 잇대어서 하늘을 쓸며 다가오는 모습에는 머뭇거림도 돌연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거침이 없이 크고, 앞을 모두 장악하여 보려는 듯 꾸준하고 도도하다. 구름이 저만큼 멀어져 갈 때 그 뒷모습은 소소하고 구차한 꾸밈이 따르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한 번 뜻대로 거두어 보았다는 듯 미련을 남겨두는 느낌이 없이, 홀연하다.

 

바다는 햇빛을 받으면 옥색의 빛깔로 몸을 적셔보고 싶은 물빛이지만 구름이 그림자 지으면 마음조차 저어하는 빛깔을 띤다. 구름이 낮게 하늘을 덮을 때면 바다의 물빛은 검은 색깔에 가깝다. 닿으면 살 속으로 스며들어 살점이 천덩천덩 녹아내릴 듯 섬뜩한 독소(毒素)의 빛깔을 연상시킨다. 바다가 이럴 때는 해녀들은 물질을 하지 않는다.

바람이 일면 물결이 해면을 쓸어오고, 쓸어간다. 물결을 지우고 또 지우고, 쉼없이 지우기를 거듭하여 바라보고 있는 마음을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 가운데에 풀어놓는다. 온몸이 씻기고 깎이며 거품으로 스러진다. 그동안 지나간 사람들의 잔상들도 한동안 지녀본 마음의 그림자들도 더불어 사라지기를 바라는 기대가 없지 않다. 막연하지만 간절한 이런 기대에는 피하에서 새살이 돋아 오르리라는 믿음 같은 것도 깔려 있다.

 

집으로 내려오기 전에 세워보았던 계획들은 착수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그런데도 마음은 편하기만 하다. 한 몸이 태어난 것을 세상의 시작이라 할 수 없다면 그 한 몸의 죽음 또한 세상의 끝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끝없는 구름, 넓은 바다, 혹은 바람의 큰 모양 앞에서 미미하게 여겨지는 한 생명의 의미 같은 것에서 벗어나 있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느긋하고 편안한 마음이 스스로도 새롭다.

 

2.

이슥한 밤.

머리를 들어서 사방을 둘러본다.

 

한라산을 정점으로 밋밋한 산잔등이 좌우로 두껍게 흘러내리고, 그 뒤로 어슴푸레한 푸른빛이 멀고 차갑다. 산 중턱 어둠의 허리쯤에 주황 빛깔의 띠가 몇 가닥 가로로 놓여서 바람에 나부끼듯 도막도막 가물거린다. 중산간(中山間) 도로이다.

그 훨씬 아래에 이쪽으로 어둑한 숲 사이에서 가로등이 깜박거린다. 잔약하고 성긴 불빛 주위에 어둠은 한결 넓고 깊게 스며들어 있다. 큰 어둠에 작은 인적들은 묻히어 보이지 않는다.

 

나지막한 인가들 사이로 누워 있는 돌담들이 구불구불 검은 누에 같다. 굵은 것이 힘에 넘쳐 굼틀거리는 듯하다. 밭을 둘러싼 돌담 주위로 길쭉이 늘어선 어둠은 더욱 두텁다. 잡초 가운데에 몇 기식 더부룩이 솟아 있는 무덤들 주위로 버려진 듯 허술한 돌담은 별빛 아래 한층 더 괴이하고 새까맣다.

물 빛깔도 돌담처럼 검다.

돌담의 검은 빛깔이 사방 어둠을 단단하고 빈틈없게 이어놓고 있다.

머리 위의 어둠이 물개 섬을 돌아서 등대의 불빛 밖으로 몰려 있다. 눈썹 사이에서 은실처럼 갈라지는 별빛이 어둠을 희박하게 풀어놓는다. 어둠은 별빛을 비껴나고 돌아서 더욱 깊게 모인다. 그 뒤로는 넓고 깊은 암흑이다.

바닷가의 어둠은 별빛에 대조되어서 한결 광막하고 낯설게 다가선다. 휑하니 뚫려 있는 길에는 반향이 없고 어둠을 타고 밤바람이 가슴 주위를 돌아든다. 파도 소리에 밤 바닷가는 더욱 외지게 느껴진다. 번득이는 물결은 쉬지 않고 넘실거리고, 부서지는 소리가 칠흑 가운데서 쇠끝처럼 튕기며 닿는 대로 박히고 헤집을 듯 날카롭다. 휴식이 없는, 고적한 바닷가의 밤은 강렬한 기운이 흐른다.

 

3.

싸락눈이 진눈깨비로 변하더니 바다 쪽으로 나 있는 통유리를 휘몰아친다. 유리의 겉면에 쌓이는 눈발이 무늬무늬 허물어지며 하얗게 줄을 긋고 흘러내린다. 천지가 회색빛 가운데로 휩쓸리고 있다. 검질긴 바람 소리가 허공에 흉흉하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

창 밖의 거친 흐름에 가슴을 벌려두고 브람스의 합창곡들을 음향기기에 걸어놓는다. 죽음을 노래하는 다섯 무리의 관현악 리듬이 차례로 내려와 가슴에 얹힌다. 검고 어둑한 폭설풍 앞에서 온몸으로 죽음의 애도를 느껴본다. 브람스는 절대자와의 대면을 맛보게 하는 죽음의 노래들을 악보에 장중하게 그려내었다.

빛조차 사라진 실내에서 완성의 충족감이 그렁그렁 뼛속까지 맺힌다. 적절한 말을 지금은 찾을 수 없으나 '삶의 완성'이라는 축복의 느낌 가운데에 죽음의 맛이 섞여 있다는 생각이 아주 낯선 것은 아니다. 브람스는 오선지에 마지막으로 두 개의 세로줄을 긋던 때 죽음의 느낌에서 완성의 맛 같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완성을 의미하는 죽음의 맛이 이렇게 놓여나 있는 맛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연의 일부로 회귀하여 있다는 느낌 가운데에 이런 생각의 뿌리가 있겠다.

폭설풍이 지나가고 맞이한 아침이 평화롭다. 맑은 햇살은 수면에서 바람을 따라 몰려다니며 은빛으로 남실거린다. 여름철, 한낮의 태양이 바다 위에 머물면 바다는 쏟아져내리는 금빛을 사방으로 되쏘아올리고, 빛 일색으로 변모한 주위는 완고한 노출로 버티면서 시선을 납작하게 누르려 한다. 안개처럼 엷게 흰빛을 머금은 푸른 대기는 너무도 강렬하여 그 가운데로 눈을 주면 두 눈망울은 허공에서 검고 흰 맹점으로 명멸한다. 눈이 부신 북촌대가는 빛 가운데에 유리의 성(城)처럼 솟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