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현이의 달

 

                                                                                         김수자

어느 날 승현이가 내게 물었다. "할머니는 보름달이 좋아요, 반달이 좋아요?"라고. 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할머니는 반달이 좋은데 승현이는?"

승현이 자기는 보름달이 좋다고 했다. 나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그만한 어린아이들이야 온전한 것이 좋지 반쪽의 것이 왜 좋겠는가. 과일 한 개라도 온전한 것이 좋고, 호떡 하나, 뻥튀기 하나라도 온전한 것이 좋은 건 당연한 얘기 아닐까.

"그렇구나. 우리 승현이는 보름달을 좋아하는구나. 그런데 할머니는 반달을 좋아하니까 우리는 보름달, 반달을 모두 좋아하는 셈이네, 그렇지?"

이렇게 승현이와 말을 하다가 나는 갑자기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과연 내가 승현이만 했을 때 나는 어떤 달을 좋아했을까 생각해 봐도 특히 어떤 달을 좋아했던 기억은 없다. 초승달이 떴으면 눈썹 같은 달이 떴다고 좋아했고, 보름달이 떴으면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아도 무섭지 않고 햇볕처럼 따갑지 않아서 밤이 깊은 줄 모르고 놀 수 있어서 좋았고, 그믐달은 손톱 같은 달이 떴다고 또 좋아했을 뿐, 어떤 달이 왜 좋은지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생각이 둔해서였을까. 초등학교 일 학년짜리 승현이의 야무진 물음 앞에 새삼스레 생각을 더듬어 본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반달을 좋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때가. 모르긴 해도 반달이 좋아지기 시작한 시기와 나에게서 순수성이, 소박한 마음이 가시기 시작한 시기가 반비례하기 시작한 때가 아닐까. 세사에 시달리고 인간관계로 부대끼면서 무엇에게인지 기대를 걸고 싶었고, 꿈과 희망을 걸어 볼 어떤 대상이 필요했을 때 꽉 차서 빈 곳이 없는 곳엔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으니까 뭔가 조금 여분이 있는 것을 찾다가 그리 된 건 아닐지.

시름에 겨워 목적 없이 밤길 나섰다가 올려다 본 하늘에 떠 있던 약간은 이지러진 달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을 내 관념으로 고정시킨 건 아닐는지.

미처 채워지지 않은 저 달에게는 채워질 수 있는 내일이 있으니까 꿈이 있고 희망이 있지 않을까. 그것을 기다리는 여유를 즐기는 멋도 괜찮을 것 같구나 하는 그럴듯한 명분을 세워서.

그건 어디까지나 세상을 조금 안 나이, 약간은 때가 묻었고, 마음에 흠집이 생긴 어른의 관점에서 거기다가 억지 의미를 부여해서 바라본 주관적인 달일 뿐, 공중에 떠 있는 본래의 달 그 자체로 보는 달은 아니지 않은가. 승현이가 보는 달처럼 밝고 둥근 자연적인 달이.

모든 의미를 배제하고 순전히 달 자체만 놓고 말하자면 완전한 둥근 달이 좋지, 한쪽이 이지러진 불완전한 조각달이 정말 좋을 수도 있을까?

진실로 기다리는 여유를 즐길 양이면 그믐달을 좋아함이 옳지 않을까? 차면 기울고 기울면 다시 차는 달인데 왜 굳이 반달만 가지고 채울 수 있는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초승달은 보름달을 향해 점점 차오르고, 기우는 그믐달은 초승달을 향해 점점 차오르다가 마침내 만월에 이르는 그 시간은 얼마나 긴데 어중간한 반달을 왜 기다림의 여유로 삼았을까?

그렇다면 보름달을 기리는 정월 대보름은 무엇이고, 온 나라가 들썩이며 축제를 지내는 보름달의 축일인 팔월 한가위는 뭐란 말인가.

아! 이 수수께끼 같은 인간의 마음, 그 끝없는 허구여. 우리는 언제까지 참 생각 아닌 꾸민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나. 이제라도 나는 달 속에 계수나무가 있고, 그 아래서 두 마리 토끼가 사이좋게 떡방아 찧고 있다는 동심의 달을 승현이의 보름달 속에 담아주어야겠다.

승현이가 지금 보름달을 좋아하듯이 먼 훗날에도 보름달을 성취의 보름달, 만족의 보름달로 여기며 보름달을 좋아하는 마음 바꾸지 말고 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한국수필>에 수필 천료(82년). <시조문학>에 시조 천료(83년).

시조집 『내일은 안개꽃 찾아가리라』, 수필집 『사과향기』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