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갈잎 한 장

 

                                                                                        許世旭

해발 3천5백 미터의 황룡구(黃龍溝)도 때마침 요락의 계절이었다. 산문을 들어서서 작은 오솔길을 돌며 돌며 올라가지만 머리가 어찔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토록 흔한 산소가 여기선 모자란 모양이다. 세상이 이렇게 달라질 줄 몰랐는데.

이따금 스쳐가는 바람결에 누우렇게 말라버린 가랑잎이 후드득거린다. 수억 년의 세월 그 흔적들이 반질반질한 석회의 퇴적층에 고스란히 남아서 환히 눈에 읽히는데 가랑잎 굴러가는 소리가 왠지 수선스럽다.

황룡구는 그 이름대로 도랑이 아니었다. 민산(岷山)의 주봉인 설보정(雪寶頂)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이었다. 계곡이라기보다 여울이요 바위의 사다리였다. 바위의 사다리에서 퉁퉁거리고 떨어지는 물줄기가 넓은 마당에서 숨을 고르면서 다시 머리를 돌려 쏜살같이 달리는 이 출렁임을 옛 사람은 황룡이라 했다.

그러나 황룡이라기보다 황전(黃田)이었다. 그것들은 맨 위쪽 황룡사로부터 나한당(羅漢堂) 유적지까지 18킬로미터, 높게는 해발 3천6백 미터에서 낮게 3천1백 미터의 지점까지 사다리꼴로 일구어진 물논 같았다. 아니 연못이나 웅덩이 같았다. 아니 작은 염전이나 묘포 같았다. 아니 백칠의 소반이나 은제 대야 같았다. 다만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것은 거기에 담긴 물빛과 그 물이 넘칠 듯 넘치지 않게 두두룩한 그 가상자리의 낮은 두덩이었다.

그 물빛은 오색이었다. 그 중에도 깊은 바다를 닮은 쪽빛과 가을 하늘을 닮은 코발트 빛, 그리고 바람에 살짝 날려가는 참피나무의 연노랑, 그것들이 층층의 웅덩이에 잠겨 뚫어지게 길손을 보고 있었다. 나를 옴쭉 끌어다 감추어버릴 듯 진하디 진한 빛깔이 차라리 몸서리쳤다. 그 두덩은 아름다운 여인의 고운 손길로 빚은 작은 연적의 손잡이 같았다. 아니 하얀 구슬이 대글대글 구르다가 살짝 멈추도록 은쟁반의 갓도래 같았다. 아니 귀여운 아가의 벌겋게 달아오른 귓불 같았다.

그 웅덩이를 물끄러미 보노라면 미끈미끈한 연분홍 반석 위에 꼼짝하지 않은 채 굳어버린 쪽빛 물, 그것들은 비취를 녹인 듯 영롱하지만 저 밑바닥까지 사무치는 수심, 그것은 차라리 녹색의 진공관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분재의 연못'이나 '비취의 못', '달빛 푸른 연못' 따위로 부르지만 어디 이름이란 게 실체의 눈곱이나 미치랴!

이를 두고 '해자(海子)' 또는 '채지(彩池)'라 불렀다. 해자는 그 크기를 두고, 채지는 그 빛깔을 두고 지은 이름이다. 바다의 자식이란 말에는 동화적인 발상이 묵어 있어 긔 더욱 좋았다.

어렸을 적, 꿈에 천국을 보았었다. 무언지는 몰라도 희끗희끗 아롱아롱한 사다리를 타고 울긋불긋 무지개를 멀리 보면서 아슬아슬 어디쯤인가 오르다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등짝에는 흥건한 땀 여울, 그렇게 눈을 뜨곤 했었다. 그때마다 한기가 돌았었다. 지금의 황룡구 채지들이 약간 어찔어찔한 내 눈꺼풀에 들어와선 사다리꼴의 지형 그 층층의 구슬 물로 범벅인데, 옛날 꿈속에 보았던 그 천국의 계단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오늘 따라 나의 관심은 저 채지의 귓바퀴에 앙증스럽게 달린 두덩이었다. 색종이를 오려서 일렬로 코를 세운 듯 진흙을 반죽하여 작은 담장을 치듯 그린 두덩은 아무리 보아도 사람의 간지러운 솜씨였다. 그럼에도 식자들은 이 모든 채지의 형성은 수억 년 동안 카르스트, 곧 암용岩溶의 현상이라 했다. 반질반질한 백자 빛 반석은 석회성 물질의 침전이요, 쪽빛이나 코발트의 물빛은 광물질의 굴절이란다. 그리고 목수가 줄자를 치고 벽돌을 쌓듯 저토록 선명한 두덩의 횡선(橫線)이 자연의 퇴적현상이라 했다. 떨어진 잎새와 떨어진 가지, 그것들이 석회질에 범벅되어 처음엔 개밋둑이 되었다가 흙무더기가 되고, 다시 둑이 되고 모래톱이 된다는 말이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숨이 가쁜 대로 한참을 올랐다. 이윽고 계곡이 활짝 트이면서 잔잔한 여울이 펼쳤다. 이름하여 '금사포지(金沙鋪地).' 금빛 모래가 깔린 땅이라 했다. 그 가상자리를 쉬엄쉬엄 걷는데 잡목이 우거진 여울은 물조차 한눈을 팔고 있었다. 참피나무 마른 가지가 잡목의 뿌리에 걸려 흐름을 멈추고 있었다. 그 가지에 거먕옻나무 잎새 서너 장이 엉거주춤 앉아서 해찰하고 있었다. 떡갈나무 갈색 잎새도 덩달아 참피나무 가지를 붙잡고 있었다. 그것들이 서로 손을 잡고 도열하면서 길게 금을 긋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저 횡선이 엉겨서 담을 치고, 담은 어느 날 둑을 쌓으리라는 생각에 빙긋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떡갈잎 한 장이 화석으로 남아서 어느 박물관에 전시된 일은 그렇게 희한한 일이 아니었다. 낙엽들이 낮은 여울에 남아서 작은 둑을 짓고 작은 채지를 만들어 그 안에 물결도 일지 않는 파란 술잔으로 남을 줄이야! 그 파란 술에 구름이 내려와 산보하고 하늘이 내려와 머리를 감고.

무릇 떨어진 것들은 그 자리를 떠나거나 그 모양을 잃을 때 더욱 아름답다. 꽃은 떨어져서 흙이 되고, 물은 떨어져서 흰꽃을 피우고, 잎은 떨어져서 두덩을 만들 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