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은혜

─ 최희남 선생을 추모하면서 ─

 

                                                                                              정명환

 

지금부터 나는 중학 시절에 나를 가르친 은사 한 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위에 적은 것과 같은 아주 진부한 제목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진부한 표현은 때로는 모든 사람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어떤 절실한 감정을 가리키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뿐 아니라, 그 선생을 찬양하는 글을 쓰자니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의 마음은 어버이시다’라고 아이들이 부르는 ‘스승의 은혜’의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아이들이야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직은 실감하지 못하고 그냥 부르겠지만, 나로서는 나의 긴 생애를 돌이켜볼 때 그 선생의 은혜를 줄곧 되새겨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 말기에 서울에 있는 한 공립중학교에 다녔다. 우리들 ‘조선인’을 ‘충량(忠良)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만들려는 교육이 어느 때보다도, 또 다른 어느 학교에서보다도 철저하게 가해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 제일선에 선 것은 물론 대부분의 일본인 선생들이었고, 일례로 “조선인들은 면종복배를 잘 한다”고 우리를 모욕한 아즈마(東)라는 이름의 한문 교사의 노회(老獪)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모든 세뇌공작과 마찬가지로 이 황국신민 만들기에도 틈새가 있었다. 당시의 어느 제국대학 출신이라는 한 일본인 선생은 “우리 집안에 해군 소장이 있는데 나는 그가 잘났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잡담으로 자기는 군국주의자가 아님을 넌지시 말해 주었다. 한데, 이런 반체제 정신을 내비치는 간접적 언어가 특히 거의 모든 한국인 선생의 언어였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너희들에게는 부모도 없느냐?”는 훈계 속에는 “왜 천황의 적자(赤子)가 되려고 하느냐?”는 꾸지람이 내포되어 있었고, 한 생물 선생은 느닷없이 “설렁탕은 뚝배기로 먹어야 제 맛이 난다”는 말로 사라져가는 전통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다시 말해 우리들이 잘 새겨듣기를 기대하면서 이루어졌던 은연(隱然)한 의식화 교육의 분위기에서, 유독 파격적으로 직접적 언어를 서슴지 않은 선생이 한 분 있었다. 음악을 담당하던 최희남(崔熙南) 선생이었다. 2학년 말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선생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조선 사람은 세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사람 다음으로 머리가 가장 좋다.” 무슨 계재였는지는 기억이 없고, 또 선생이 그런 소설(所說)을 어디서 찾아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하고많은 민족이 있는데 하필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을 으뜸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필경 무슨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나라 역시 나치스 독일에 점령된 불행한 소수민족의 나라였고, 또 드보르자크나 스메타나와 같은 작곡가와 정교한 유리 공예와 성능 좋은 기관총으로 유명해서, 언뜻 그 나라의 이름이 선생의 입 밖으로 새어나왔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간에 선생은 이른바 식민지사관에 의한 교육 때문에 자멸적(自滅的)이 되기 쉬웠던 우리의 정신에 충격요법을 가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하다.

바로 그런 선생이었기에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당시 우리 중학교에서는 교가를 부를 수 없었다. 하기야 ‘그 옛적부터 이어져온 계림전토(鷄林全土)의 여망(輿望)을 등지지 말고 역사의 빛을 밝혀나가자’는 뜻을 담은 묵은 교가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노래는 비록 일본말로 되어 있기는 했어도 ‘내용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입학하기 전부터 이미 금지되었고, 그 대신 일본 군가의 선율을 따온 ‘행진곡’을 부르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다. 선생은 그 가사 중에서 “드높은 북악(北岳)을 우러러보고 저 멀리 경룡(京龍)을 바라보면서”라는 한 구절을 들어올리고, “여기에서 경룡은 무엇을 가리키느냐?”고 물었다. 한 급우가 즉각 손을 들고 대답했다. “경중(京中)과 용중(龍中)입니다.” 우리는 어린 마음에도 이 대답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중과 용중은 일본 소년들의 교육기관인 경성(京城)중학과 용산중학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은 당장에 안색이 변하더니 그를 불러내고 호되게 뺨을 때리고는 소리쳤다. “이놈아,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경중과 용중을 멀리 바라보아야 한단 말이냐? 경룡이란 경성의 남쪽을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을 가리키는 시적(詩的) 표현이니 똑똑히 알아두어라!”

제국 이본이 극성을 떨었던 시기에 음악 교사였던 최희남 선생이 이런 대담한 민족의식의 고취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선생의 저항정신은 우리에게 많은 노래를 가르쳐주고 들려주는 중에도 나타났다. 우리는 샬리야핀이 그 굵고 무거운 목소리로 부른 ‘볼가의 뱃노래’를 들었고, 일본 노래 중에서도 군가가 아니라 서정적인 가곡들을 배웠다. 그리고 선생은 영어도 몇 자 모르는 우리에게 슈베르트의 ‘보리수’ 첫 절을 독일어로 외우게 했다.

내가 고분고분한 모범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는 것만큼은 면할 수 있게 해 준 선생의 은혜를 나는 잊을 수 없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선생에 관한 일들을 엊그제의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해방이 되자 선생은 서울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었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이 났을 때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나 그 모습은 내 속에 살아 있다. ‘보리수’를 듣거나 부를 때는 약간 얽고 두툼한 선생의 얼굴이 언제나 눈앞에 나타난다.

 

일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러시아의 대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평생에 두 번 운 일이 있는데, 그 중 한 번은 스탈린의 강요로 소련 공산당 가입원서를 내야 했던 날의 밤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다시 최희남 선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전교생이 ‘기미가요’를 제창할 때, 소위 ‘국민복’ 차림으로 지휘봉을 휘둘러야 했던 선생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때 선생의 마음 속에서 흘렸을 눈물은 얼마나 쓰디썼으랴! 이제 와서 일제 시대의 행적을 조사하고 고발하겠다고 나서는 철없는 작자들은 그런 쓰디쓴 눈물의 의미를 편린(片鱗)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인가! 꿈에서나마 만나 뵈면, “선생님께서 겪으신 고생에 무엇으로 보답하오리까” 하고 말씀드리면서, 잘 꾸부러지지 않는 늙은 허리를 한껏 꾸부리고 싶다.

 

서울대학교, 가톨릭대학교 교수 역임. 학술원 회원.

저서 『한국 작가와 지성』, 『졸라의 자연주의』, 『문학을 찾아서』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