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 그리고 깨달음

 

                                                                                           고임순

 

일상에서 손을 털고 훌훌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삶의 전환점으로 활기를 찾는 계기가 된다. 낯선 곳에서 다른 풍물을 접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비교해 보면 내 존재가 더 뚜렷이 드러난다. 여행이란 세계의 다양성과 마주하고 나를 돌아보는 성찰의 기회인 것이다.

지난 해 가을, 나 홀로의 러시아 여행은 서화 전시회를 열기 위함이 그 목적이었다. 푸슈킨 시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막내동생이 오래 전부터 선교 차원에서 성구전을 계획하고 나를 초청해 준 것이다.

떠나기 전날, 짐을 꾸리면서 정성으로 준비한 50점의 작품을 상자에 차곡차곡 담았다. 이 분신들을 이국땅에 내려놓고 대신 무엇을 담아올 것인가 생각하면서 바람에 떠밀리는 표박의 나그네 되어 두 눈을 크게 떠서 모든 것을 포착하고 미지의 땅의 색채와 향기까지도 빈 상자에 채우고 오리라.

18세기 러시아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푸슈킨 시는 가을장마에 젖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늘로 뻗은 흰 자작나무가 이국적 정취를 물씬 풍기는 길을 걸으면 눈물 먹은 잎새들이 하나 둘 떨어지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시성 푸슈킨의 영혼이 잠들어 있음인가.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마을이었다.

사색적이고 말수 적은 동생은 이러한 분위기에 끌려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했다.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 10년 세월을 러시아인의 선교에 헌신하면서 푸슈킨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담당하고 있는 동생은 이곳에 거주하는 유일한 한국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은 동생 한 사람뿐이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카메라를 둘러멘 동생 뒤를 따라다녔다. 전시회 날까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동생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이 마을의 명소인 호화찬란한 예카테리나 궁전, 그리고 인공미와 자연미가 조화된 파블로프스크 궁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푸슈킨이 다닌 리째이 학교와 살던 집을 방문하고 그의 동상을 바라보니 유명한 시 한 수가 떠올랐다.

그리고 승용차로 40분 거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를 찾았다. 세계적인 국립 에르미타쥐 박물관을 비롯하여 이삭 성당, 피의 사원, 카잔 성당 등을 돌아보고 네프스키 대로를 걸었다. 네바 강으로 해서 여름 궁전의 분수들 앞에서 마음을 씻고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 모스크바를 가는데는 밤기차를 이용했다. 붉은 광장, 레닌 묘, 성 바실리 사원을 둘러보고 참새언덕에서 모스크바 대학을 배경으로 서서 시원한 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리고 톨스토이, 고골, 푸슈킨 등 박물관을 두루 살펴보고 볼쇼이 극장에서 오페라를 관람하고 돌아왔다.

그 옛날, 동생을 업어주고 밥도 먹여주며 보살펴 준 것처럼 그 사랑을 되돌려주듯 내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안내하며 자세히 설명을 해 주는 동생. 그러나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욕구는 내가 전혀 러시아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읽지 못하고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인가를 절감하면서 외국 관광객 사이를 서성거렸다.

이렇게 일주일 남짓을 보내면서 우리는 한편으로 전시회 준비에 만전을 다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유니온 센터에서 전시회 개장 테이프를 끊던 날, 가나안 신학대학 학장을 위시하여 동생의 선후배 목사님들과 신학대학 학생들, 그리고 고려인 3세들과 많은 외국인들이 참석해 주었다. 목사님들의 기도와 축사에 이어 내 감사의 인사말씀으로 장내는 무르익은 모국어의 축제마당이 되었다.

먹빛이 승화된 서예술을 통해 세계가 하나가 된 전시장. 한글의 조형미와 화선지의 빛과 질감을 유심히 관찰하는 러시아인들은 특히 사군자 그림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사미인곡’ 문학작품을 감상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의 한국어과 구로반 교수가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그는 정중하게 한국말로 한국문학과 서예에 대한 특강을 요청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주시하는 여행자는 이방인 앞에 노출되는 것일까. 그 이방인의 시선은 나를 관조하여 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했다. 상대방의 호의적인 시선에 내 시선도 따라가고 이렇게 상호 교환되는 시선 속에 서로의 호의는 한 빛으로 물드는 것을.

다음 날 4시, 나는 네바 강을 건너 강변에 있는 대학교를 찾아갔다. 178호 강의실 가득 학생들과 동양학 교수들이 모여 있었다. 1897년 러시아에 파견된 최초 대사 일행 중 김병옥 선생이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시작된 이 한국어과는 『조로사전』의 저자인 A.A. 콜로도비치 교수에 의해 1947년에 재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했다. 강의실 벽에 설립자 사진과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이 몸 삼기실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송강 정철(1536~1593)의 장편가사 ‘사미인곡’을 풀이하면서 나는 한국의 가사문학에 대해서 강의했다. 상징적 표현으로 일언일구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가사문학의 최고봉으로 알려진 이 글은 임금을 사모하는 충성의 글임을 설명했다.

이어서 벼루에 물을 부어 먹을 갈고 붓을 들어 글씨를 쓰면서 서예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주었다. 그들의 많은 질문에 일일이 답해 준 다음 이번에 출간되는 한국문학사 책 『동문사(東文史)』 휘호 부탁을 받고 그 자리에서 일필휘지 했다.

폭포수 내리듯 그 동안 목에 잠겼던 모국어를 쏟고 숨통을 트던 날, 열띤 강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저녁노을에 강물이 잔잔한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강 건너 저 멀리 이삭 성당의 금빛 지붕이 아른거리는 난간에 기대어 잠시 숨을 돌렸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지점이 북위 60도 동경 30도로 우리나라에서 5천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다 해도 더 이상 이방의 한 도시로만 머물지 않고 있었다. 한글을 사랑하고 호의적이고 순박한 러시아인들이 이웃처럼 다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집을 떠나와서 감동으로 깨우친 큰 깨달음이 가슴에 사무쳤다. 기쁨과 기도와 감사로 충만한 동생의 신앙심과 따뜻한 피붙이 사랑. 그리고 러시아인들도 연구하는 우리 한글의 소중한 가치 등.

무사히 전시회를 마친 나는 성구작품을 신학대학교와 각 교회에 기증했다. 한국어과 강의실에는 무(舞) 작품을, 전시관 지배인에게는 소나무를 그린 합죽선을 각각 선물했다. 그리고 이곳에 체류 중 도움을 받은 고마운 사람들에게 일일이 작품으로 인사를 했다.

빈 상자에 담은 것은 관광명소마다에서 고개를 들고 포옴 내고 찍은 사진들이 아니었다. 귀국길, 소중한 깨달음만을 채우고 돌아오는 마음이 흐뭇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