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 속의 시간

 

                                                                                            유동림

 

투명한 2홉들이 패트병 몇 개에 종자(種子)용 알곡이 각각 들어 있습니다. 그 속에는 나의 시간과 씨앗의 시간이 함께 숨쉬고 있답니다. 내 시간은 지나간 시간이고 씨앗에게는 다가올 시간이지요. 날이 갈수록 나의 시간은 가라앉고, 씨앗의 시간은 들떠가고 있어요.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는 셸리의 시구처럼 봄이 가까워지고 있는 까닭입니다.

처음 밭을 부치던 해에 콩 한 두럭을 심었습니다. 밀레 전시장에서 본 그림에는 농부가 천천히 밭고랑을 걸으며 씨앗을 한 주먹씩 훌훌 뿌려도 땅에 골고루 떨어지던데 나는 그럴 재간이 없어 그냥 심었답니다. 앞집 할아버지가 콩은 까치와 비둘기를 잘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작년에는 예닐곱 마리이던 것이 오류동에서 시누, 동생 다 불러와 열 마리가 넘더니 올해는 새끼를 쳐서 떼로 와 콩밭 망치는 데 순식간이라고 귀띔해 주더군요.

드디어 콩 자체가 떡잎이 되어 나오는데 까치가 그것을 노립니다. 콩의 생명인 첫 잎을 새로부터 보호하려고 완두콩 마른 줄기로 가리느라 골몰해 있을 때 기척도 없이 남편이 옆에 와 있었습니다. 나뭇가지에서 까치가 내려다보고 감추는 것을 들켰으니 콩 농사를 포기하라고 합니다. 남편은 춘천에서 근무하므로 주말에 집에 옵니다. 집안을 꾸미고 맛있는 음식 해놓고 맞이할 준비는커녕, 밭에 마음도 몸도 뺏긴 아내를 찾아 나왔나 봅니다. 집에서 나올 때는 밭에 있는 생명들과 눈인사만 하고 남편 오기 전에 돌아오려 했으나 그것들에 붙잡혀 시간도 잊고 남편 오는 날도 잊고 맙니다. 다른 여자들은 늙지 않으려고 마사지도 한다는데 무슨 보물이 나오기에 허구한 날 밭에서 산다고 언짢아 합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력을 들인 완전 무공해식품을 어디서 구하며, 이렇게 소중하게 기른 것을 나누는 즐거움을 그가 알 리 없죠. 남편도 퇴직 후에는 경쟁과 속도에 지친 심신의 안식을 대지에서 찾게 될 것입니다. 병 속에 있는 씨앗들의 희망도 저버리지 않고요.

 

억압과 통제의 사슬인 울타리, 혼(魂)도 가둔다는 철조망 울타리를 겁도 없이 넘나드는 덩굴들. 학명이 ‘한삼덩굴’이라는데, 그건 도둑을 ‘양상군자’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과분하고 흔히 깔깔이풀이라는 이름이 격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돌보지 않아도 어찌 그리 기세가 시퍼런지 영역 확장에는 선수여서 덩굴콩과 호박덩굴이 뻗어갈 자리까지 점령합니다. 껄끄러운 덩굴손이 얼마나 사나운지 식물이라기보다 동물처럼 느껴진다는 이도 있습니다. 호박덩굴도 넓은 잎사귀와 굵은 줄기로 인해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덩굴강낭콩이 빈약하고 순해 보이지만, 뻗어나가며 감는 재주는 결코 뒤지지 않을 듯 이 세 가지의 경쟁이 치열합니다. 방해꾼인 깔깔이풀에게 눈을 흘기고 울타리콩에게 응원을 하며 힘을 실어줍니다.

그 억센 적 틈에서 본성에 충실하여 열매를 남기는 콩, 통통하게 알이 찬 울타리콩을 쌈지째 꼬투리에서 따는 기쁨은 행복을 손으로 생생하게 만지는 순간입니다. 병 속의 콩도 그런 시간을 기다릴 것입니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 진저리를 칠 만도 한데 살아 있는 생명을 상대해서인지 밭에서 하는 일은 질리지 않습니다. 비 오는 날 집에 있으려니 몸이 찌뿌드드하고 비를 맞는 곡식들 모습이 궁금해 오금이 저립니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밭에 나와 참깨 모를 솎고 있습니다. 앞집 할아버지는 깨 모가 비를 맞고 방실방실 웃는다 하고, 31호 아저씨는 고추 모가 너울너울 춤춘다고 하는데, 26호 할머니는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소용 없어유. 하나님이 도우셔야지” 합니다. 모두들 흡족한가 봅니다. 골라 세운 참깨가 나붓나붓 생기에 찬 모양이 참 보기 좋군요. 나도 그렇게 키울 수 있을지. 새로운 일에 대한 소망이 불을 지핍니다. 다음 날로 씨를 뿌렸습니다. 비가 자주 찔끔거려 하루가 다르게 자랍니다. 멍석만한 깨밭에 날마다 정성을 쏟았습니다. 곡식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던가요. 앞집 깨만큼 어금버금 따라가고 있습니다. 깨를 심기에는 너무 늦다고 말리던 이들이 이제는 깨 농사 잘 되었다고 칭찬을 합니다. 정성들여 가꾼 것은 마치 내 자식 같고 내 작품 같아 찬사를 들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오래 전 홍수가 났을 때 일입니다. 남편과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일층 집 짐을 올려주고, 예전 이웃이던 지민이네와 재수네 집이 일층 양쪽에 살고 있어 중학생인 두 아들애를 재촉해서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집집마다 퇴근 전이어서 여자들만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때 학생 둘이 와서 살림을 건질 수 있었다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엄마가 시킨다고 오물이 뒤섞인 물이 목까지 차는 곳을 건너와 궂은일을 마다않는 애들이 요새 어디 흔하냐고 하며 “아드님 잘 키웠네요. 애들이 잘 컸네요” 치켜세울 때나, 어쩌다 문우로부터 어디에 실린 글이 살아 있는 글이어서 또는 감칠맛이 있어 좋더라는(지나가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말을 들을 때, 그리고 내가 애착을 갖고 심어 가꾼 것이 칭찬을 들을 때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정성껏 지은 참깨로 만든 깨소금을 우리만 먹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깨의 바람은 또 다를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선택된 알갱이로 채워지는 병 속에 들어가 종자가 되기를 염원할 테니까요.

 

옥수수 씨가 담겨진 병은 두 개입니다. 가지색과 섞여진 것이 자잘하고 쫀득쫀득한 맛이 일품입니다. 그 찰옥수수가 사돈의 사돈댁에서 씨앗에 날개 달고 멀리 대구에서 두 다리 건너 사돈집까지 거리낌없이 잘도 건너옵니다. 또 한 가지는 밭 울타리 밖에서 어떤 아낙이 주먹을 울 사이로 불쑥 내밀어 강원도에서 가져온 옥수수인데 여기 심고 남은 것이라고 하며 건네준 것입니다. 옥수숫대가 크고 실하더니 옥수수도 팔뚝만하게 열렸습니다. 그것을 따자마자 아무것도 넣지 않고 찐 맛이 찰옥수수 못지않더군요. 톡톡 여문 옥수수가 입 속에서 터질 때 묘한 맛을 느끼며 그게 바로 순수한 맛이란 걸 알았습니다. 남편은 옥수수를 참 좋아합니다. 하루 세 끼 옥수수만 찾기도 합니다. 옥수수 먹을 때만은 밭농사 짓는 것을 탓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때를 놓칠세라 “내가 옥수수를 심지 않았다면 금방 따서 찐 옥수수 맛을 어떻게 보겠느냐”며 생색을 냅니다. 옥수수 씨를 많이 두었다가 이 농장에서 밭을 부치는 여러 사람에게 나눠 주었고 고향에도 많이 퍼뜨렸습니다. 울 밖에서 그 여인이 씨앗을 나누지 않았다면 그처럼 널리 퍼져 나갈 수 없었겠지요. 이렇듯 모든 생물은 우성 유전자에 의해 오래 이어갈 것이고 널리 퍼져 나갈 것입니다. 이 종자들의 꿈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어요. 꿈은 관념이 아니고 실존일 수도 있으니까요.

병마다 각기 다른 얘기가 지나간 시간 속에 숨어 있는 것을 틈틈이 끄집어내어 펼칩니다. 아무리 덜어내어도 줄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들어 있는 기억들이 살아 있는 한, 겨울에도 나는 밭에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씨앗을 담아놓는 병은 장식이 되기도 하기에, 같은 크기의 보기 좋은 유리병을 몇 개 구해서 바꾸려고 합니다.

유리병 속의 씨앗은 기다리는 시간이고 내게는 기억하는 시간이 되겠지요.

 

<한국수필> 추천,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청구문화재 최우수상. 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