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평>

 

머잖아 50년

 

                                                                                       박장원

 

1

1,300 년 동안 이름 모르는 절터 땅 밑 물 속에 잠겨 있다가 우연히 발견된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의 복제품을 인사동 거리를 지나치면서 눈여겨본다. 두 자가 조금 넘는 키에 한 자가 못되는 가슴둘레의 체형이건만 그 향로의 간결하면서도 중후한 위용은 봉황이 허공을 날아가는 날렵함과 잠룡이 대지를 끌어안는 당당함 그리고 촘촘히 도드라진 숱한 진금이수珍禽異獸의 방향芳香으로 맑고 밝은 상상을 연출한다.

2004 년 10월 16일 수필문우회는 이하윤의 ‘메모광’에 대한 합평회를 열었다. 그 대화 가운데 현대 수필문학의 발전을 축하하는 이야기가 있다.

“50년 전에는 명문이었으나 지금은 평범한 작품이라는 의견에 공감합니다. 교과서에서 이 글을 배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독후감에 차이를 느낄 것입니다. 이는 지난 50년 사이에 우리 수필이 많은 성장 발전을 했다는 반증입니다.”

어둔 밤하늘 무수히 빛나던 영롱한 그 별들은, 아하 ─ 너무나도 먼 곳에 있기에 백 년, 천 년, 만 년 전의 별들의 형상이 조립되어 전해진 모습이며, 우리가 그 별빛을 볼 때 그 별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을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시간의 무상함과 공간의 무한함으로 망연해진다.

“머잖아 50년, 그리움 속에 세월을 느낍니다.”

합평회에서 토로된 노교수의 회한을 들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는데, 어느 물리학자의 설명은 그저 막막해진다. 가장 오래 된, 가장 새로운, 아직도 미래의 문학형태인 우리 수필은 지금 어떠한 모습일까. 50년 전에는 명문이었으나 지금은 평범한 작품이라는 빛나는 돌아봄은 값진 어록 아니겠는가.

2004년 <계간 수필> 겨울호 33편의 수필진용은 별처럼 눈부시다. 힘차게 막 출발한 신인에서부터 한 세기를 넘겨 주옥 같은 시어들을 다듬어 온 중진에 이르기까지 주제를 향한 긴밀한 조직에서 표현의 절제와 시적인 언어 그리고 이미지의 창조가 반짝거린다.

수필은 자기 이야기다. 자기 이야기는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다. 때문에 그 줄거리에 온유한 문학이, 진정한 사랑이, 겸손한 반성이 있다면 우레와 같은 갈채가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라도 용을 새기듯 한 자 한 자 스스로를 정성스럽게 새겨나간다면, 거기에서 우러나는 문향은 대향로에서 은은히 타오르는 가방佳芳처럼 멀리멀리 퍼져나갈 것이다.

 

2

김金 선생의 근황은 일상을 통한 인간 고찰이다.

 

‘티셔츠나 러닝셔츠, 양말, 수건 같은 것은 빨래바구니에 넣어서 마루에다 내놓으세요. 그러면 어멈(함께 사는 며느님)이 가져다가 빨 거예요. 팬티는 당신이 샤워할 때(1.5평짜리 그들 전용 세면실이 안방에 붙어 있다) 비누질을 해서 헹궈가지고 세면대 옆 빨래걸이에 널어놓으세요. 빨래바구니에 넣지 마세요.’

 

정진권의 ‘다시 짧은 글 연습’은 제삼자를 내세워 자신을 이야기하는 자아의 형식 실험이다. 샤워를 마치고 팬티를 비벼 맑은 물에 헹구고 물기를 탁탁 털어 반듯하게 걸어놓고서 마나님의 두 번째 전화를 다소곳이 기다리는 선생은, 이제까지는 고리타분하게 서재에서 학문만을 탐구하여 왔지만 누가 뭐래도 이제부터는 여성은 남성의 창조적 삶의 원초라고 외치는 세련된 노학자로 거듭난다. 어쩌다 한번 선생을 좀 섭섭하게 하는 마나님은 누워서 앉아서 서서 돈을 받는 호사를 누리지만, 선생은 그것을 행복이라 굳게 믿는다는 독백에 흥이 난다. 그의 3인칭 수필은 소설과 희곡과 콩트가 혼재한다.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면 상상과 꿈이 피어난다.

 

‘베네치아의 바다 안개를 헤치고 날아온 비둘기는 나의 머리 위에 화려한 영혼의 향기를 뿌려주었고,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또한 여행은 분명 나에게 꿈의 무대였고, 그 꿈은 너울너울 나의 그림 속으로 작은 참새가 되어 날아와 앉는 것이다.’

 

박항률의 ‘머리 위의 새’에는 영혼의 콤포지션이 기하학 무늬로 드러난다. 선과 선을 이은 평범한 구상으로 펼쳤지만 독특한 분위기로 변신한 머리 위의 새는 하늘과 땅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오르다가, 그의 머리 위에 영적인 인도자가 되어 내려앉는다. 아무데나 보금자리를 틀지 않고 가지도 가려 앉는 새가 항상 목마르게 찾아 헤매던 명상적인 인간으로 형상화되고, 막연한 이미지를 구체화시키는데 오랜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꿈은 너울너울 그의 그림 속으로 작은 참새가 되어 날아와 앉는다는 종결은 예지적이다.

 

굵은 팔뚝을 얇은 끈으로 커버하고 타이트하게 자신을 분출하는 과감성이 반갑다.

 

“인간으로서 성숙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의미의 ‘완경’이란 언어로 파티를 열었던 그들처럼 나도 잔치를 하고 싶다. 허릿살이 좀 삐져나오면 어떠랴. 나도 한 번쯤은 화려한 댄스복을 입고 춤추고 싶다. 필시 쑥스러워할 남편에게도 연미복을 입혀놓고 진정한 휴머니스트의 스텝을 밟으리라. 살짜기 살짜기…….”

 

전윤미의 ‘살짜기 옵써예’는 현대수필의 또 다른 패러다임이다. 그는 누차에 걸쳐 ‘살짜기 살짜기’라고 호흡을 조절하지만, 자신의 육체에 대한 효과적인 임팩트는 통쾌하다. 음지의 수군거림을 양지의 파티로 이끌어 온몸을 들썩거리게 하고, 1년 366일 월경을 한다는 남성에 대한 연민을 통해서 편향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진정한 휴머니스트로 상생을 제시한다. 그러기에 자신의 심성을 살짜기 드러내는 나상수필裸像隨筆을 체현한 그는 새롭다.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늪 속의 깊은 세계를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처절하게 드러낸다.

 

‘수억 년 침묵을 흔드는 수초들의 씻김굿, 그 소리에 갯버들이 긴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우는 듯했다. 지난 세월이 물장지뱀같이 수면 위를 재빠르게 달렸다. 나는 점점 늪으로 빠져들었다. 제일 먼저 엄마의 한을 꺼내고 싶었다.’

 

정경희의 ‘늪에서 즐거움을 낚다’는 커다란 슬픔에서 잉태된 세월의 모자이크다. 날기 위해서는 제 몸이 뜨거워져야 한다는 나비는 지구를 비상하고, 깍두기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며 울부짖던 하얀 교복의 소녀는 늪 주위를 서성인다. 오랜 방황으로 세월을 헤매다가 슬픈 세상살이가 마음에 와 닿으면 사물의 세계에도 눈물이 있다는 것에 눈뜬다. 오싹 소름끼치게 빠져만 드는 늪에서 즐거움을 낚는 시야의 확장으로 아이러니스트(Ironist)의 지혜가 샘솟는다.

 

옹기종기 그의 집, 조가비처럼 작은 제비집에는 평화의 순례자들이 모여 산다.

 

‘옥상으로 올라갔다. 남편은 웅크리듯 모로 누웠다. 그의 등 뒤 돗자리자락에 앉았다. 크고 작은 별들이 밤길을 가고 있다. 별을 보며 길을 헤아리던 순례자같이 우리도 그렇게 가고 있는가. 별 하나가 날아간다. 옛사람이 빛이 지기 전에 소원을 빌어야 한다고 했느니, 두 눈을 가리고 얼른 남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이정하의 ‘제비집’에는 시지푸스의 어둠이 내려 있지만, 다시 올라간다는 숭고한 다짐이 있다. 방충망에 물린 제비집 때문에 창문을 닫아놓고 감내하는 불볕 여름살이에서 새끼를 보듬고 잠들은 까만 꽁지의 제비와 얼굴에 숙연한 달빛이 어려 있는 남편을 대비시킨다. 하늘의 별만 빛난다면 너는 깎아지른 절벽에 발을 붙이고, 나는 두 눈 가리고 남편의 등에 얼굴을 묻고 살아간다. 한여름 밤 커다란 별들의 집 아래에는 작은 제비집과 옹기종기 그의 집이 휘황하다.

 

애절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건만 소박한 제재와 구수한 이야기로 오히려 구성지다.

 

‘누이는 나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순순히 알코올로 얼굴과 손을 닦아낸 후 핸드백에서 립스틱과 눈썹그리개를 꺼내 어머니를 화장시켜 드렸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차디 찬 감촉이었으나 생각보다 경직되어 있지 않았다. 문득 어머니의 손가락을 살펴보았다.’

 

조만연의 ‘골무’는 전통적인 사고가 변모하는 가운데서의 오롯한 순수이다. 오래 된 골무는 그냥 지나친다면 꾀죄죄한 모습이겠지만, 불의의 사고로 뜻하지 않게 어머니의 상징으로 깊이 새겨진다. 사실 우리는 이런 수필을 무수히 보아왔기에 그 결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따스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진지한 수필은 세월이 가더라도, 시대가 변하더라도 어머니의 골무처럼 오래도록 그 온기를 지닐 것이다.

 

<수필문학>과 <계간 수필>로 등단(2001년). 수필평론가.

수필집 『양수리』, 수필평론집 『코끼리 이야기』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