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印度)의 시간

 

                                                                                           金藝卿

 

신기한 문물을 살피며 외국여행을 많이 하는 이들을 보면 참 부러운 마음이 든다. 외국을 여행하는 데에는 그만한 재력은 물론이지만 그에 상당한 건강도 따라 주어야 할 것이다. 재력은 고사하고 건강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행보가 부럽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특히 인도에 한 번 가보고 싶다. 소도 많고 거지도 많고, 성자聖者도 많고 신神도 많다는 인도에 가면 어쩐지 피안의 세계로 통하는 길목을 만나게 될 것 같기도 하다.

류시화 시인이 쓴 인도 여행기를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인도를 여행하던 중 만난 거지에게 몇 푼을 줄까 망설이다가 그 거지로부터 “크게 포기하면 크게 얻는다”라는 충고를 들었다는 에피소드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인도의 거지는 당당하게 동냥을 요구하며 적선을 베풀어주어도 결코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얼른 듣기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인도의 이런 매력에 사로잡혀 발길을 계속하는 시인 역시 내게는 매력적으로 보인다. 인도를 여행한 사람들의 글을 읽다 보면, 인도의 거지는 원래 철학자였든지 아니면 결국 철학자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인도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잠시 귀국한 이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귀국하기 바로 얼마 전에 그가 직접 목격한 사실이라고 한다. 한 초등학교 여학생이 학교에서 수도꼭지를 열어 물을 직접 받아 마시다가 교사의 눈에 띄어 얼마나 심히 맞았던지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신분계급에도 들어가지 않는 불가촉천민이었다. 불가촉천민은 다른 계급 사람들이 이용하는 우물이나 수도에서 직접 물을 떠서 마실 수가 없다. 그들은 아무리 목이 마르더라도 다른 계급의 누군가가 물을 마시러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른 계급의 사람이 물을 마실 때 넘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밑에서 받아 마시는 것이 그들의 본분이다.

힌두교의 교리에 의하면, 전생에 지은 죄가 너무 많으면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부정하다. 그들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부정과 죄를 옮긴다고 힌두교는 가르친다. 전생의 악업을 보속하고 내세에 좀더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기 위해 그들에게는 현세에서의 비천한 삶의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녀가 눈이 멀게 되었다 해도 그 처지를 동정하거나 공분(公憤)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런 행동은 오히려 소녀에게서, 다음 생을 준비하는 기회를 빼앗는 일이다. 그러니까 실명이 되도록 매질을 한 선생은 그 소녀가 자신의 악업을 씻는 데에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인 것이다.

불가촉천민에게는 신분은 물론이지만 가난조차도 극복해야 할 불행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업보다. 이미 타고난 비천한 신분이나 가난은 결코 뛰어넘을 수 없고 뛰어넘어서도 안 되는, 신이 정해 준 운명이니 그들의 희망은 언제나 다음의 생에 있다. 일단 현실을 체념하고 나면 세상사란 아무 희망이나 가치를 둘 만한 것이 못 되리라는 짐작이 간다. 인도의 성자가 모두 불가촉천민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도에 성자가 많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인도에는 현재 2억 명이 넘는 불가촉천민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힌두교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살아왔고 그 결과 3천5백여 년 동안이나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비록 가난하지만 세속적 욕망이 없는 그들은 마음이 순수하고 크게 죄짓는 일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3천5백 년이 지나도록 변함없이 형벌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찰나도 쉬지 않고 흐르는 역사의 시간이 그들에게만은 멈추어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인도라 하니 역시 인도는 불가사의의 나라다. 그 행복지수가 산출되는 근거는 아마도 그들에게만 존재하는, 정지된 인도의 시간일 것이다.

불가촉천민이란 원래 통치자에 의해 조작되고 강요된 사회적 불평등 제도다. 통치자의 편의를 위해 악의적으로 계획된 인간 비하였을 뿐 원래 그들의 운명은 아니다. 인도인들이 신분제도로 인한 악한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신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나름대로 해 보게 된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들의 악한 현실은 신의 탓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의 악은 인간의 탓이지 결코 신의 탓은 아니다.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 그로써 자신의 악업을 씻는다는 힌두교 식의 이해라면, 가진 자는 당연히 주어야 하고, 얻은 자는 감사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빈부의 차이는 저절로 없어질 것 같은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역시 그들의 신의 뜻일까?

요즘은 다 잊혀진 일이지만 어렸을 때 우리들 사이에서는, 건너 마을의 어느 골짜기에는 절대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지켜지고 있었다. 그 골짜기는 백정이라는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었다. 힌두교의 가르침과 비슷한 인식이 우리의 관습 속에도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자랄 때 나는 어른들로부터 현세의 모든 고통은 당연한 업보이니 잘 참고 받아 다음의 생을 예비해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알 수 없는 반감 같은 것이 느껴지곤 해서 그 말에 공감해 본 적이 없다. 불행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네가 쌓은 전생의 업보요 네 팔자이니 무조건 참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때면 나는 어쩐지 그에게 적개심 같은 것마저 느껴진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대개는 기득권자이거나 가진 자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여러 사람의 안전과 평화가 보장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그것을 참된 평화라 할 수는 없다. ‘조용한 것이 평화로운 것’이라는 야비한 억압의 그늘 밑에 또 다른 불가촉천민이 신음소리를 죽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일본에서도 역시 백정의 신분인 부라쿠민들이 지금까지도 그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하니 그에 비하면 우리의 선진적인 민주의식이 새삼 자랑스럽게 여겨진다.

유럽의 정복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는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기도 했다. 인도를 정복한(B.C. 331) 알렉산더는 그의 여생을 인도에서 보내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는 인도에 머문 지 이태도 못 채운 어느 날 도망치듯이 인도를 떠났다. 그 후 그는 바빌론에서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생을 마쳤다. 역사가들은 세계의 정복자요 위대한 인간이었던 알렉산더를 파멸로 이끈 것은 바로 인도였다고 말한다. 시간이 멈춘 나라 인도에서 알렉산더는 과연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언젠가 인도를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불가촉천민 특히 그 여인들의 깊은 눈동자에서, 흐르지 않는 인도의 시간을 찾아보리라. 알렉산더를 절망하게 했을지도 모를 그 선험적이고도 철학적인 눈길에 사로잡혀, 피안의 세계로 통하는 길목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수필공원>으로 등단(98년).

저서 『단감찾기』, 『가까이 더 가까이』 공저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