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기고 싶은 앙금

 

                                                                                             김명규

 

초등학교 일 학년, 동네 교회 유치원생, 네 살짜리 막내. 공휴일만 되면 우리 집 삼남매는 즐거운 놀잇감이 없어 괜스레 짜증을 내며 엄마의 치마꼬리를 감고 칭얼대었다. 그런 날 아이들은 탕수육 한 접시를 곁들인 자장면으로 맛난 외식도 기대했을 것이며,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핥으면서 이용권이 비싼 어린이공원의 놀이기구도 타고 싶었을 것이다.

둘째인 이녀석. 동네 아이들 틈에 끼어 놀다가 돌아오면 대문이 열려 있어도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고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우편배달부 아저씨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강이남(강인한이라는 제 아빠의 이름을 그렇게 들었던 게지) 씨! 도장 가지고 나오세요.”

방 안에서 동화책을 읽거나 인형놀이를 하고 있을 두 누이를 놀리는 장난이었다. 순진한 딸들은 우르르 방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나왔다. 정말 천사 아저씨가 찾아온 양 뛰어나왔지만 깜빡 속은 딸들은 실망한 얼굴로 서 있었고, 녀석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집배원이 가져오는 등기우편물은 내가 여성지 독자란에 투고해서 실린 적은 원고료이거나 시를 쓰는 남편에게 오는 소액환 고료였다. 그런 가욋돈이 생기게 되면 중국음식점에서 외식을 할 수 있고, 아니면 과일이나 케이크를 푸짐하게 사먹을 수도 있었다. 도장을 가져오라고 찾는 우체부가 어린것들에게는 선물을 들고 찾아온다고 믿고 있던 산타할아버지만큼 반가웠을 것이다. 꿈에 떡 얻어먹듯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일을 아이들은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렸을까.

내 어릴 적 읍내에 ‘풍미당’이라는 제과점이 있었다. 집에서 그곳까지 십오 분 정도의 거리였을 테지만 내 걸음으로는 십 리도 넘게 느껴졌었다. 결혼을 준비하고 있던 고모가 물 바랜 광목에 십자수를 놓다가 색실이 떨어지면 그 먼 읍내 풍미당 옆의 수예점으로 내게 심부름을 보냈다. ‘구뎡 불란사 보까시 보라색 남색 빨간색 몇 꼭지’라고 연필로 종이조각에 써 준 것을 손에 쥐고 나는 집을 나섰다. 귀찮은 심부름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은 수예점 옆 풍미당에서 새어나오는 맛있는 냄새와 진열장 안의 여러 가지 빵을 구경하는 것만도 좋아서였다. 매섭게 추운 겨울이면 물에 씻은 고구마처럼 빨갛게 언 손이 시린 것도 잊고 나는 그 집 앞을 얼마나 서성거렸던가.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훌쩍 큰 언니들은 삐그덕 소리가 나는 그 문 안으로 드나들었다. 내가 먹기엔 너무나 비싼, 계란 노른자를 섞어 만들었는지 샛노란 ‘나마가시(생과자)’ 몇 개가 보기 좋게 진열장 안에 정물처럼 놓여 있었다.

중학교 졸업식 날, 헤어지게 될 친구 몇몇이 풍미당에 가기로 하였다. 그때 나는 부모님께 큰 잘못을 저질렀다. 제과점에 가기 위해 아버지를 속여 졸업앨범 값을 두 번 타낸 것이었다. 내게 돈을 주어 빵집에 보낼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 당시의 빵집이나 다방은 연애하는 남녀가 만나는 장소로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풍미당에서 처음 먹어 본 ‘젠사이(단팥죽)’ 한 종발과 생과자 몇 개가 혀끝에서 사르르 녹던 그 맛이란……. 그러나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돌덩이를 삼킨 듯 가슴이 무거웠고, 한동안 아버지의 얼굴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큰아이가 아직 입학 전이었던 그 해의 유월 어느 주말이었다. 남편은 이른 아침 문학 동인들과 행사가 있다며 출타하였다. 그 날은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유원지에 가려고 마음먹었다. 시내버스가 파업으로 끊기고 관광버스와 봉고 차까지 동원되어 시내버스를 대신하고 있던 즈음이었다. 운 좋게 대형 관광버스가 우리 집 앞에서 유원지까지 운행되고 있었다. 만원버스를 탈 때면 어른들의 다리 사이에 끼여 시달리는 것이 얼마나 답답했던지 택시를 가리키며, 작은 차를 타자고 다섯 살 난 아들은 울며 떼를 쓰곤 하였다. 그런데 저희들 앉은키를 훌쩍 넘는 관광버스의 푹신한 의자에 앉게 되니 좋아 어쩔 줄 모르고 병아리처럼 재잘거렸다.

어린이들이 꿈꾸는 회전목마나 리프트 카 등 놀이기구가 있는 곳은 어린이공원 거기뿐이었다. 유원지는 벌써 돗자리를 펴고 둘러앉은 가족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이들은 집에서 준비해온 물과 비스킷은 관심이 없고 다른 아이들이 먹고 있는 아이스크림이며 솜사탕에 눈을 팔았다. 이곳저곳 넓은 공원에서 놀다 보니 불에 달군 쇠처럼 이글거리던 태양도 오렌지 빛으로 둥우리를 틀고 있었다. 돗자리나 소지품을 손마다 챙겨들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기다리는 대열은 흡사 배급나온 구호물자를 받으려는 사람들처럼 길게 늘어섰다.

얇은 지갑 속에는 이제 집으로 돌아갈 버스비밖에 없었다. 아침 겸 점심을 집에서 먹고 나와 빵 두 개씩으로 하루해를 보냈으니 시장기가 도둑같이 찾아들었다. 줄의 맨 후미에 서 있던 아들이 쉬가 마렵다고 누나를 데리고 공원 둘레의 풀숲으로 갔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내 눈에 아들녀석이 오줌을 눈 뒤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줍는 모습이 보였다. 초등학교 일 학년생 큰딸이 제 동생을 앞질러 숨차게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도 딸아이가 오는 쪽으로 몇 걸음 마주 향했다.

“엄마, 승일이가 풀밭에서 돈 주웠어!”

헐떡이는 소리로 큰애가 말해 줬다. 저만치 아들녀석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환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사과처럼 발그레 물들고 단풍잎 같은 작은 손에는 만 원짜리 지폐를 쥐고 있었다. 그 순간 아들을 불끈 들어 보듬으며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이고, 내 새끼, 눈도 밝은 내 새끼야!”

엄마가 그토록 감격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우리 아이들이 처음 보았을지도 모른다. 어미의 모습에 덩달아 좋아하던 어린것들.

나는 도덕 교과서 같은 훈화는 허기진 뱃속에 삼키고 머릿속에서 빠른 계산을 끝냈다. 자장면 네 그릇 이천 원, 시내의 유명한 중국음식점까지 택시비 팔백 원, 그곳에서 다시 집에까지 택시비 천 원 미만, 그러고도 육천 원이 남는 것이었다.

그 날 저녁 입 언저리와 볼까지 온통 자장면으로 검게 칠하며 우리 네 식구는 배를 불렸다. 그 당시 만원 한 장의 화폐가치는 아마 지금이라면 오륙만 원에 해당했을 것 같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나도 아이들도 옛날의 그 일을 들추어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결혼하여 과묵한 어른이 된 아들. 어린 시절의 일이라 잊혔을까, 아니면 숨기고 싶은 앙금이 되어 기억의 심연에 가라앉았을까.

 

〈에세이문학〉으로 등단(2001년).

수필집 『당신의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