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인의 섬

 

                                                                                               서숙

 

나는 바닷가 마을 강릉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 동해 바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휘어진 수평선 너머에 있을 푸른 섬을 늘 꿈꾸었습니다. 아득한 저 멀리 어느 곳엔가 도도하게 홀로 서 있을 나만의 섬, 그곳에 가고 싶었습니다.

섬을 휘감아 도는 너른 바다는 그저 짙푸를 뿐, 그 날따라 파도도 따가운 태양 아래 숨을 죽이고, 수면은 잔잔히 일렁이며 은빛 비늘을 반짝일 것입니다. 그 섬에는 초록으로 빛나는 능선이 있을 것입니다. 너른 풀밭은 온통 달구어진 공기 속에 어른거리는 햇빛을 전신으로 받아들입니다. 섬의 구릉 꼭대기에 올라 가녀린 풀잎들을 나란히 누이며 가만히 나의 머리도 눕혀 파란 하늘 흰 구름을 올려다보겠습니다. 눈이 부시겠지요. 그러면 양산을 펼쳐들 것입니다. 때문에 섬으로 가기 전 꽃무늬 화사한 양산을 반드시 장만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내게는 과분한 사치인 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부모님은 열 남매의 막내인 나를 부양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별수 없이 서울 오빠네로 왔습니다. 그다지 떳떳하지 못한 처지를 감내하는 것은 생각보다 꽤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그래서 외로웠습니다. 처음에는 바다가 없으니 섬을 꿈꾸는 일도 못했습니다. 더욱 외로웠습니다. 그래도 나중에는 바다도 없이 섬을 가슴에 담는 법을 깨우쳤습니다. 살아야 했으니까요.

바다를 못 보며, 그럴수록 더욱 짙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초록색 섬을 그리워하며, 간신히 여상을 졸업하고 작은 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취직했습니다. 쥐꼬리만한 봉급이었지만 저축도 하여 독립했습니다. 작은 나의 방이 생겼을 때는 매우 기뻤습니다. 치자색 모슬린의 원피스를 샀을 때에는 더욱 기뻤습니다. 꽃무늬 화사한 양산이 생겼을 때에는 믿기지 않는 행운을 거머쥔 것 같았습니다.

그때 그를 만났습니다. 나에게 까마득히 높은 직장상사였던 그는 안정된 모습으로 나로부터 아주 멀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일본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내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까만 직육면체의 유리 속에 황금빛 도쿄 타워가 들어 있는 갸름한 장식물이었는데 작아서 손아귀에 꼭 잡혔습니다.

그가 보여준 관심에 나는 조금씩 들떴습니다. 나 혼자만의 속절없는 짝사랑은 아닌 듯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그는 나를 어린 여동생쯤으로 여기는 듯했는데, 어느덧 우리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처자식이 있는 그는 이 만남을 때로는 풋풋한 연애로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고, 때로는 가벼운 바람기로 여기기도 했겠지요. 나는 당연히 그보다는 진지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기약할 미래가 없다는 것 따위를 염두에 둘 만큼 진전된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마음이 움직였다고나 할지.

그런데 그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래라든가 희망이라는 말들이 빛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 때문이었을까요? 아니,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그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를 속속들이 깊이 사랑한다는 확신이 들 만큼 우리가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의 사랑에 나 자신도 그다지 확신이 섰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그저 이번 생은 나에게 그다지 많은 것을 베풀어주지는 않을 작정인가 보다 하는 짐작이 갔을 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살아봐야 별수 없을 거라는 체념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삶이라는 연극무대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었나 봅니다. 그런데 불길하게도, 내가 맡을 가능성이 있는 배역 중에 주인공이 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예쁘지도 영민하지도 활력이 넘치지도 못했지요. 그래서 견딜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무미건조한 일상, 근면한 것만으로는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남루한 생활, 마음 둘 곳 없는 외로움……. 그냥 대충 살면 되지 않느냐고요? 아뇨. 관객 없는 혼자만의 연극은 이제 싫증이 나는군요. 시시해요.

스치듯 찾아온 한 가닥 사랑에의 기대가 나를 더욱 깊이 절망하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력감에 빠져들수록 마음 속의 섬이 나를 불렀습니다. 어서 오라고 말입니다. 해가 뜨던 동해와 달리 해가 지는 서해에는 섬이 참 많더군요. 이곳의 섬들은 바다 밑에서 솟아났다기보다는 가볍게 떠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스물다섯 푸른 청춘을 접어 어디론가 떠나기에 더없이 알맞은 곳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를 골랐습니다. 인천에서 배를 탔습니다. 배에 오르기 전에 친한 친구와 오빠에게 각각 편지 한 통씩을 부쳤습니다. 마무리가 필요한 몇 가지 일의 뒤처리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는데, 편지 말미에 조용히 사라지는 나를 제발 찾지 말아달라고 간곡하게 썼습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일기에도 그와의 일을 적어놓지 않았습니다. 물론 어떤 친구에게도 그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를 내 가슴에 담고 갑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죽는 것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내가 사랑한 타인이었으며 늘 낯설었습니다. 언제 우리가 가까웠던 적이 있었나요. 그런데 이렇게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니 머리 속에 온통 그의 생각뿐이군요. 생각보다 나는 그를 아주 깊이 사랑했었나 봅니다.

섬에 도착한 날,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틀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하늘은 맑고 날씨는 쾌청합니다. 이곳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잔디 언덕, 오래 된 것으로 보이는 무덤가입니다. 소주 2병에다가 수면제 한 병을 다 비웠습니다. 슬며시 잠이 쏟아집니다. 나의 완전 범죄가 흐뭇합니다. 모슬린의 치자색 원피스를 단정하게 입고 반듯하게 누워 꽃무늬 화사한 양산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나의 부재를 슬퍼해 줄 몇 사람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집니다. 그들의 슬픔이 그다지 절실할 것 같지 않아서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죽어가면서도 몹시 쓸쓸하군요. 반면 이다지도 변변치 못한 나의 생을 이쯤에서 접기로 한 이번 결정이 다행스럽기도 하구요.

나는 이제 외딴 섬에서 홀로 죽어가고, 나를 아는 이는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니, 그들이 나 때문에 번거로울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의 시신을 수습해 줄 이 섬 주민 누군가를 위하여 내가 가진 시계와 얼마간의 현금을 내 옆에 둡니다.

죽음은 영원한 잠입니다.

이 감미로운 잠에 빠지는 것이 행복합니다.

부디 안녕히.

 

<계간 수필>로 등단(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