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아카데미 제5회 강좌 요지>

 

글과 사람

 

                                                                                              김태길

 

여러 종류의 글 가운데서 ‘글은 사람이다’라는 명제가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은 아마 수필이 아닐까 한다. 수필을 ‘산문으로 그린 자화상(自畵像)’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느 수필 모임을 창립하고자 하는 발기인들이 모여서 회원 후보의 자격을 논했을 때, ‘글 좋고 사람 좋고’가 만장일치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글도 좋고 사람도 좋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도 없었다.

모든 의도적 행위에는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수필을 쓰는데도 각자 나름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적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골똘하게 생각하는 수필가는 많지 않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늘 이 강좌를 준비하는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뒤돌아보고 정리를 시도한다.

돌이켜 보건대, 처음부터 어떤 목적을 의식하고 수필을 쓰지는 않았다. 초기에는 주로 쓰고 싶은 충동에 밀려서 쓰게 되었고, 뒤에는 주로 좋은 수필을 만들고 싶은 의욕으로 붓을 들은 경우가 많았다. 다만 그렇게 쓰는 가운데, 수필을 통하여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더 크고 일반적인 목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크고 일반적인 목표란 나 자신의 ‘사람’을 만드는 일이다.

나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글을 쓸 때가 있다. 그런 글에서 거짓말을 쓸 수는 없는 까닭에 써놓고 읽어보면 나의 장단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자신의 장단점, 특히 단점을 잘 안다는 것은 나의 사람됨을 키우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분노나 증오 또는 슬픔 따위의 불행한 감정에 시달릴 때 그 감정을 글로써 표현하기를 시도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감정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다. 밖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내 감정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글을 씀으로써 불행한 감정의 소용돌이 밖으로 탈출하는 길을 열게 된다.

한 걸음 밖으로 물러서서 나 자신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가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유머로 접근한다. 유머가 몸에 배게 되면 수필의 솜씨가 한 단계 올라가는 동시에 삶의 언덕에 서광이 비췰 수도 있다. 유머는 속세의 탁류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사람이 자신의 그 모습을 따뜻한 웃음으로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이다. 유머의 달인이었던 소크라테스에게는 걱정도 없고 분노도 없었다.

 

수필인의 모임을 발기하는 자리에서 회원 후보로서 바람직한 조건을 ‘글 좋고 사람 좋고’라는 말로 요약했다고 하였다. 그 뒤에 여러 수필가들이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이냐는 문제에 관한 논의는 많이 했으나, ‘좋은 사람’에 관한 논의는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기회에 수필가로서 ‘좋은 사람’으로 불리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특성에 대한 사견(私見)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수필가로서 대성하기 위하여 굳이 성현 또는 군자와 같은 완벽한 인격자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성현 또는 ‘군자’라는 칭호에 어울릴 정도의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며, 무리하게 그런 목표에 도달하기를 꾀하다 보면, 위선자(僞善者)의 길로 빠져들 염려가 있다. 그리고 위선자의 길은 수필가가 경계해야 할 매우 위험한 함정으로 연결되어 있다. 자기도 실천할 수 없는 좋은 말을 무절제하게 앞세우며, 마치 ‘겨레의 스승’이나 되는 것처럼 문필을 휘두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남도 속이고 자신도 속이는 꼴이 되는 경우도 흔히 있다.

수필가를 위하여 가장 절실한 덕목은 진솔함이다. 많은 경우에 수필이 자화상으로서의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수필가에게 진솔(眞率)의 미덕이 필수적임은 스스로 명백하다. 예컨대, 어떤 중소기업에 종사하는 수필가가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 장사꾼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고충과 갈등을 있는 대로 털어놓으면, 좋은 수필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 장사꾼보다도 훨씬 더 교활한 수법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인색한 기업인이, 마치 오로지 문화사업 내지 사회사업을 위하여 돈을 모으는 특지가로서 자신을 묘사한다면, 예리한 독자들은 그를 가련하게 여길 것이다.

수필가에게 적합한 성품으로서 둘째로 떠오르는 것은 맑고 담백함이다. 흐리고 음침한 성격은 수필 쓰기에 부적합하다. 잔머리를 굴리는 모사(謀事)에 능한 사람도 좋은 수필 쓰기와는 인연이 멀다.

수필을 위하여 적합한 성품으로서 세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불의(不義)를 미워하는 강직함이다. 올바른 사회를 지향하는 강직한 성품에서 탁월한 사회 수필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강직(剛直)과는 대조를 이루는 온후한 성품도 그것이 날카로운 재기(才氣)와 결합하면 좋은 수필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성품이 온후해서 남을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쓰는 글은 읽기에 편안하고 무난하기도 하나 좀 헤심심할 경우가 많다. 반면에 날카로운 재기를 앞세우는 수재의 글은 그 비판이 통쾌하기는 하나, 수필로서는 좀 차다는 아쉬움을 갖는다. 그러나 저 온후한 사랑의 따뜻함과 이 예리한 비판의 날카로움이 한데 어울리면 탁월한 수필을 생산하기도 한다. 온후한 성품과 날카로운 재기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룰 때 수필의 극치라고 볼 수 있는 유머의 꽃이 핀다.

 

수필에 뜻을 둔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악덕은 탐욕이 아닐까 한다. 탐욕은 만인이 경계해야 할 악덕이지만 특히 수필가에게는 치명적이다. 수필이 본래 깨끗하고 담박한 마음가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주로 선비들이 시문詩文을 즐겼으므로 수필과 탐욕이 어우러지는 경우는 적었다. 그러나 현대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수필을 쓰게 되고 또 돈이 아니면 만사가 불가능에 가까운 세태이므로, 수필가도 탐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수필은 그 특성으로 볼 때 생업(生業)으로 삼기는 어렵다는 약점을 가졌다. 따라서 생활비를 얻을 수 있는 딴 길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수필에 전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근래에 수필 인구의 저변이 확대되면서, 개중에는 생업을 겸해서 수필에 매달리는 사례도 나타나게 되었다.

수필의 저변인구가 크게 늘면서 수필을 지상에 발표하기를 원하는 사람도 따라서 늘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여러 가지 수필 잡지가 우후죽순 격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여러 수필 잡지 사이에 생존경쟁이 벌어졌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기구독자의 수를 늘리는 길밖에 없었고, 구독자의 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앞을 다투어 많은 신인新人을 등단시키는 동시에 그들의 글을 인심 좋게 실어줄 수 있도록 잡지의 면수(面數)를 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수필 잡지의 발행이 장사거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수필 잡지 시장은 그 여러 잡지들이 수지를 맞출 수 있도록 크지 못하다. 여기서 자연히 생기는 것이 탐욕스럽고 무리한 잡지 운영이다.

 

수필에 뜻을 둔 사람이 경계해야 할 또 하나의 심성心性은 속물근성(俗物根性)이다. 우리나라의 수필은 본래 선비들의 풍류심(風流心)을 토양으로 삼고 출발한 것으로서 전통적으로 격格을 숭상해 왔다. 글에 있어서나 사람에 있어서나 품격이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시대와 계층에 따라서 그 품격의 개념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나, 나는 수필에서 말하는 ‘좋은 사람’은 우선 속물근성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작품을 쓰는 일은 뒤로 미루고 문학단체에서 감투 쓰는 일에 열을 올리는 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으며, 상이라면 아무것이나 주는 대로 받는 것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