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렁이 생각

 

                                                                                           강호형

 

젊은이 망령은 몽둥이로 고치고 늙은이 망령은 곰탕으로 고친다는 말이 있다. 거친 음식이나마 배불리 먹기가 어렵던 시절에, 치아마저 부실한 노인 공양으로 곰탕만한 음식도 없었을 것이다. 재료는 물론 쇠고기지만 그 중에서도 족과 꼬리를 으뜸으로 쳤다. 그것도 여름에는 꼬리곰탕 겨울에는 족탕이다. 파리, 모기 따위를 쫓아야 하는 여름에는 기가 꼬리로 모이고,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겨울에는 족으로 모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은 소가 한낱 식용 가축에 불과하지만 옛날에는 가족 같은 일꾼이었다. 제 집 논밭 다 갈고 추수 퇴비 다 실어 나르고 남는 시간에는 이웃집 품앗이까지 했다. 자연 주인도 소에게 쏟는 정성이 극진했다. 특히 겨울이면 외양간 바닥에 푹신하게 북데기 깔아주고 덕석 입혀 주고 뜨끈한 쇠죽도 쑤어 먹였다. 그러니 소로서는 일 바쁜 봄, 가을이나 쇠파리, 진드기에 시달려야 하는 여름에 비하면 겨울은 천국 같았을 것이다.

우리 집에도 누렁 황소가 한 마리 있었다. 그 많은 일 다 하고 남의 일까지 다니면서도 꾀 한 번 부리는 법 없는 순둥이였다. 그렇게 순한 녀석도 신경질을 낼 때가 있었다.

어느 해 여름이었다. 냇가 버드나무 밑에 누렁이를 매어 놓고 한참 물놀이를 하고 있는데 누렁이가 앞발로 흙을 파 끼얹어가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온몸에 까맣게 달라붙은 쇠파리를 쫓고 있는 중이었다. 얼굴에 붙은 놈들은 혀를 내밀어 핥아내고, 몸통에 붙은 놈들은 꼬리를 세차게 흔들어 사정없이 후려치고, 가슴팍에 붙은 놈들은 뒷발로 쫓아내는데 그래도 당할 수가 없자 앞발로 흙을 파 끼얹고 있는 것이었다. 더러는 꼬리털에 맞아 죽어 떨어지는 놈도 있었지만 황소 기운으로도 그 악착스러운 흡혈귀들을 퇴치하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쇠파리만도 아니었다. 등줄기에는 등애도 붙고, 사타구니 쪽으로는 진드기도 박혀 있었다. 몸부림치는 누렁이보다 내 몸이 더 가렵고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놈들은 이제 내게까지 달라붙었다. 마침 바로 옆에 우뚝우뚝 서 있는 쑥을 한줌 꺾어 들고 누렁이 몸에 붙은 흡혈충들을 닥치는 대로 후려쳤다. 놈들도 생명체라 먹고 살자고 하는 노동일 터이지만 우리 집 식구나 다름없는 누렁이나, 하물며 그 상전인 내가 그 따위 미물들에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참 그러다 보니 이제는 내게 달라붙는 놈들을 퇴치하기에도 손이 모자랐다. 그러자 영감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고삐를 풀고 누렁이를 냇가로 몰았다. 누렁이도 단박에 내 뜻을 알아차리고 겅중겅중 뛰어 물 속에 몸을 담갔다. 그러나 물이 뱃구레 밖에 차지 않아 등 쪽으로는 아직도 등애와 쇠파리가 새까맸다. 나는 고무신짝으로 물을 퍼 끼얹다가 그래도 안 떨어지는 놈들은 신짝으로 후려쳤다. 이윽고 자갈밭으로 나선 누렁이가 긴 한숨을 토해내며 진저리치듯 물기를 털었다.

내가 이 반세기도 더 지난 옛날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인도네시아 일원에서 일어난 지진 해일 참사를 보고서였다. 이번 사건을 두고 어느 기독교 목사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자, 종교 분쟁을 부추기는 발언이란 비판이 나왔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파괴해서 자초한 재앙’이란 자성론에 대해서는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공범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것이 ‘하느님의 심판’이라면 종교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자연에 대해 오만한 인간에게 내리는 징벌이어야 하고, 그것도 상대적으로 더 오만한 선진국 어디에 내려져야 마땅하다. 살아 있는 곰의 쓸개에 대롱을 박아 즙을 빨아먹는 그 근성으로, 지구의 심장에 수많은 쇠파이프를 박아 빨아 올린 석유로 문화생활 하다가 대기를 더럽혀 그 질서까지 무너뜨리고, 수천만 년에 걸쳐 생성된 자원을 캐내고 베어내서 단 한 번 쓰고 쓰레기를 만들어 산과 바다를 병들게 하는 등의 오만이 선진국일수록 더 심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쇠파리 진드기처럼 악착스레 빨아대고 물어뜯는데, 하느님이 아니라 지구인들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경제 침체의 원인이 내수 부진에 있다며 소비를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소비를 덜 해서가 아니라 그 동안 소비가 미덕이라는 마약에 취해 너무 흥청거린데서 오는 상대적 체감 현상일 뿐이다. 지나친 소비는 미덕이 아니라 재앙을 불러들이는 죄악이다. 만일 이것을 늙은이의 망령이라고 비웃는 젊은이가 있다면 소비를 부추기는 것은 젊은이의 망령이다.

젊은이 망령이라고 몽둥이를 들 수 없는 것이 요즘 형편이고, 그렇다고 곰국이 나올 것 같지도 않으니 딱한 일이다. 오늘 따라 누렁이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