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의 천사

 

                                                                                            유혜자

 

오랜만에 멜로디가 울리는 보석 상자의 태엽을 감았다. 뚜껑을 여니 ‘희망의 속삭임’의 멜로디가 울려서 “거룩한 천사의 음성 내 귀를 두드리네…” 하고 노래를 따라 불러본다.

천사의 음성은 주일학교 시절, 성경 이야기에 자주 나왔었다. 여호와의 전령으로 아브라함과 야곱 등에게 예언을 전해 주고 예수 탄생을 알려주는 천사의 음성이었다.

신입사원 시절, 월부로 산 명화전집 중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그림은 마음을 사로잡았다. 『성서 메시지』 연작의 하나인 ‘아브라함과 세 천사’는 붉은색 바탕에 세 천사가 식탁에 앉아 있고 서 있는 아브라함, 왼쪽에 음식 그릇을 든 사라가 있다. 천사들은 99세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리라고 했다. 창세기 18장의 내용인데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 밖에 ‘꿈’, ‘굿모닝 파리’, ‘일몰’ 등의 밝은 색채는 천지창조 때의 태고를 생각나게 했다. 순수하고 순진한 세계. 동물과 풍경, 물체는 사실적인 재현을 넘어 유년과 고향이 어우러지는 서정의 세계이고 과거와 현재를 아우른 그림을 그렸다. ‘수탉’, ‘가족’엔 자신이 기르던 닭과 염소, 당나귀 등을 그려 넣고 ‘나의 마을’ 등엔 동물의 얼굴을 그려 넣은 자화상도 있다. ‘도시 위에서’와 ‘산책’, ‘파란 풍경 속의 부부’의 하늘에 둥둥 뜨는 환상적인 그림들은 우리가 생각했어도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실현해 준 듯했다. 그의 상상의 세계는 초월적인 힘을 담고 있었다.

샤갈은 러시아의 비테프스크 마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그는 1, 2차대전을 겪고 나치 박해와 유대인들이 대량 학살을 당한 시대에 살았다. 그런데도 그의 색채는 화려한 것이 많다. 노란색은 구원의 색으로, 빨강은 러시아에 대한 향수와 유대인에 대한 형제애의 표현, 성서의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 썼다. 파란색은 평화와 자유의 상징으로 유대인의 신을 경배하는 숭배의 색이어서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미국으로의 망명과 프랑스로 귀화, 이민족으로서의 외로움을 겪었는데도 그는 현실을 벗어난 세상을 노래해서 우리에게도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한다.

90년대 초, 박상우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 화제의 소설이었다. 제목에서 샤갈 그림에 대한 나의 느낌과 공통점이 있을까 궁금했다. 1970, 80년대의 어두운 정치적 현실을 강박적으로 의식하는 젊은이들을 그려서 1차적으로는 나의 기대와 다른 내용이었다. 폭설이 퍼붓는 80년대 말 제야에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다가 두 사람만이 남아 카페에서 만난 여인의 작은 화실을 찾는다. “이들의 몽롱한 시야에 붉은 태양과 하얀 염소, 한 다발의 꽃과 두 여인, 옹기종기 모여 있는 눈 덮인 마을과 겨울나무가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잠자고 있던 그런 풍경인 것 같았다.” 그 화실의 주인인 노처녀가 “누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줄 수 없나요. 내가 그를 기다린다고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에서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처절하게 말한다. 출구가 없이 절망의 혼미한 기류만 흐르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출구가 없다는 결미에는 현실에 대한 초월의 의지를 끝없이 갖고 있는 작가의 숨은 뜻이 있지 않을까. 샤갈의 그림들도 외로움과 아픔을 그리면서 현실을 뛰어넘는 꿈을 꾸었다. ‘그림은 내가 또 다른 세계를 향해 날아가도록 해 주는 창’이라고 샤갈은 밝히고 있다.

또한 “우리 인생에서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은 사랑의 색깔이다”고 한 샤갈은 ‘도시 위에서’와 몇 개의 그림에서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사랑의 감정을 이입했다. 그림을 보고만 있어도 인식하지 않은 곳으로 끌려갈 듯하다. 그만의 색다른 은유와 상징이 담긴 ‘검은 마을’, ‘녹색의 집’, ‘붉은 말’ 등은 시적인 공간들이다. 많은 이야기를 응축한 듯하다. 사랑과 꿈, 현실을 벗어나 자유로운 세상을 사는 꿈, 향수와 유대인의 전통과 자전적인 내용들이 색채와 형태에서 초현실주의적 특성을 띄기도 했다.

성서 그림에는 성서의 내용을 그대로 묘사만 하지 않았다. 독특한 상상력으로 꽃, 동물, 연인 등을 그려 넣어서 성경을 처음 보듯 새롭고 경이롭게 해 준다. 성서에 대해서 다시금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든다. 다른 색채와 형상으로 태어나 더욱 진지한 신앙의 영매(靈媒)가 될 것 같다.

20세기를 살다간 샤갈, 그가 살던 시대와 소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때의 상황과는 다르지만 어려운 경제, 낙관적일 수 없는 암울한 현실에서 ‘부드럽게 속삭이는 앞날의 그 희망…’ 노래를 부르고 싶다. 신앙과 고향을 향한 집착, 원초적 그리움을 주제로 삼았던 샤갈,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빛과 미래를 보았다. 그 빛으로 형상을 창출해서 우리에게도 빛을 전달한다.

그는 고갈된 시대에 신앙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자유로웠으며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독특한 세계를 이룰 수 있었다. 명실 공히 20세기 회화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확고한 지위를 굳힌 것은 ‘아브라함과 세 천사’의 아브라함처럼 신앙 깊은 그에게 “기존의 방식에 구애받지 말고 자유롭게 독특한 세계를 맘껏 펼쳐 보라”는 천사의 속삭임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인지 샤갈이 천사처럼 전하는 메시지는 시공을 넘어 우리에게 현존한다. 붓끝으로 탄생시킨 생명들이 우리에게 영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준다. 내 영혼 안에 뿌리를 내려 나로 하여금 끝없는 꿈을 꾸게 하고 현실 너머의 세계를 누리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