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와 산새

 

                                                                                        백임현

 

방학을 맞이한 손녀들이 주말이면 와서 이삼 일 놀다가 간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지만 보통 때는 학원이다 뭐다 해서 어른보다 더 바빠 얼굴 보기가 힘들다. 지금도 방학이지만 주중에는 여전히 할일이 많아 주말이라야 겨우 틈을 내서 잠깐씩 다니러 온다. 사교육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사회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어 어른 못지않게 고달픈 것이 요즘 아이들이다. 우리 아이들이 자랄 때는 방학만 되면 시골 할머니 댁에 가서 마음 놓고 놀다 오곤 하였었다. 그러나 요즘은 어디를 가도 그렇게 한가한 아이들을 구경하기 힘들다.

조용하던 집안에 아이들 소리가 나면 생기가 돌고 혈육이라서 느끼는 애틋한 감동과 기쁨이 있어서 우리는 주말만 되면 그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이들은 우리 집에 오면 숨가쁜 공부에서 놓여나고 어른들이 저희들 하자는 대로 비위를 맞춰주기 때문에 아주 좋아한다.

여자아이들이라 특별히 성가시게 하는 일은 없으나 심심하면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라서 이것이 때로 난감하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예나 이제나 변함없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인 것 같다. 우리도 자랄 때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고, 우리 아이들도 그랬다. 지금 우리 손녀들도 역시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니 그것은 정말 유구한 내력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나에게는 아이들의 이 주문보다 더 곤혹스러운 것이 없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 때와 달리 텔레비전, 인터넷 등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서 아는 것이 어른보다 더 많다. 우리의 전래동화나 서양동화는 벌써 책을 읽어서 다 알고 있고, 그리스 신화, 탈무드 같은 고전도 텔레비전 만화를 통해 이미 다 안다. 심지어 영어학원에서 신데렐라, 피터 팬 같은 명작을 원어로 배우고 있으니 내가 아는 지식으로는 아이들에게 할 이야기가 없다.

생각다 못해 즉석에서 동화를 창작해 들려주기도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워낙 말주변이 없는데다가 내 마음이 동심을 잃은 지 이미 오래고, 상상력이 무디어져 재미있고도 유익한 이야기를 즉석에서 꾸며낸다는 것이 글쓰기보다 어렵다. 어떤 작가는 어머니의 무궁무진한 옛이야기가 글쓰기의 원천이 되었다는데, 소위 글을 쓴다는 사람이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궁색하여 이처럼 쩔쩔매다니 한심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런 할미가 아이들 보기에도 딱했던지 어느 날은 할머니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뭐냐고 물어본다. 알고 있는 것은 많지만 너희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 했더니 지난 주에는 느닷없이 심청전을 이야기해 달라고 한다. 제 엄마한테서 들었는데 할머니에게 들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효녀 심청이라면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어온 고전 중의 고전으로 효심을 일컫는 교과서가 아닌가. 그 이야기라면 아무리 말솜씨가 없는 나라도 잘할 수 있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아이들은 어떤 이야기보다 흥미 있게 들었다. 그들이 가장 열심히 듣는 부분은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가 다시 살아나 고귀한 왕비가 되고 그의 아버지가 눈을 뜨는 마지막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특히 그들의 관심은 죽은 심청이가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였다. 죽은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던 것 같다.

아직 세상을 살아보지도 않은 어린 것들이 사후 세계에 대해 지나치게 흥미를 갖는다는 것이 안 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생각해 보면 이들도 생로병사의 인간적 숙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을……. 그들은 몸이 약한 할머니 걱정이 많다. 주변에서 죽음이 가장 임박한 사람은 아무래도 늘 빌빌 하는 할머니라고 생각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또한 나의 사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그들은 착하게 살면 죽어서 꽃이나 새가 된다고 생각한다. 텔레비전 만화나 책을 통해서 알고 있는 지식일 것이다. 할머니가 착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그들은 내가 죽어서 꽃이 된다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다. 할머니에 대해 쓴 동시에서도 각각 이렇게 읊었다.

 

‘돌아가시면 꽃이 되어 날 보면 웃고 계실 우리 할머니.’

‘진달래꽃이 되는 우리 할머니 나를 보고 웃고 섰네.’

 

내 사후 문제가 아이들의 시적 제재가 되고 있으니 나는 이미 죽음의 골짜기에 들어선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염원대로 정말 꽃이 되고 싶다.

그런데 하고많은 꽃 중에서 왜 하필 진달래인가. 나는 진달래도 좋아하지만 목련도 좋아하고 장미도 좋아한다. 이왕 죽어서 꽃으로 다시 환생할 바에야 오월 하늘 아래 여왕처럼 화려한 장미가 되고 싶고, 아니면 이른 봄 학처럼 고고한 목련으로 살고 싶다. 아이들에게 연유를 물으니 그 대답이 기발하다. 진달래꽃이 되어 산마다 피어 있으면 자기들은 ‘산새’가 되어 모든 산을 날아다니면서 언제나 봄만 되면 할머니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설명이었다. 아이들의 상상이 전설같이 아름답다.

이야기 속에 우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나는 어느 새 이른 봄 산마다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꽃이 되어 웃고 섰고, 아이들은 예쁜 산새가 되어 할머니의 환생인 꽃나무 가지에서 고운 노래를 부르겠지…….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보겠지만 우리는 다정하게 정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제 할머니의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지는 행복한 생명의 연장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이란 결코 죽음으로 허무하게 소멸되는 유한한 것이 아니다. 환생을 거듭하며 영속되는 불멸의 본원인 것이다. 아이들과 같이 이런 상상을 하다 보니 나의 생각도 순수해진다. 생과 사의 경계도 존재성의 구별도 모호해진다. 생명의 본질이란 어쩌면 아이들 생각처럼 지극히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천진무구한 마음 속에 영혼의 본질이 있다고 한 어느 책에서의 말처럼…….

그 날 밤 아이들은 진달래를 그리고 산새를 그리며 아름다운 또 하나의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