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가 춥다고 혀서…

 

                                                                                         은옥진

 

연일 강추위가 계속되던 날, 이사 간 친구네 집엘 가는 중이었다. 생각 없이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언뜻 스친 풍경 하나가 시선을 붙잡았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좀 봐줘.”

근처를 잘 알고 있는 옆자리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무슨 일인데…….”

“이따 얘기할게.”

금방이라도 길가에 차를 세우고 싶었지만, 1차선에서 주행 중인 차를 차선 셋을 거쳐서 도로변에 정차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마저 설핏해서 끄무레한데다가 하늘은 먹구름장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보라가 휘몰아칠 것만 같았다.

아파트와 빌딩 숲으로 우거진 대로(大路). 그런 사거리 인도에 어떤 사람이 웅크리고 있었다. 먼 빛으로 푸성귀가 그 사람 앞에 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한랭전선의 영향으로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넘고 있다는 기상예보가 막 보도되고 있었다.

날씨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 새 집들이할 친구 집 앞에 당도했다.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고,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에게 눈짓을 했다. 지나쳤던 그 자리에 같이 가자는 뜻이었다.

사위에 어둠이 내려 주변 사물이 희끄무레했지만, 쭈그리고 있는 사람은 좀 전에 보던 그대로였다. 티셔츠 차림으로 오들오들 웅크려 떨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수북하게 쌓아놓은 무더기가 두툼한 옷에 덮여 있었다. 앞자락을 들추니 시금치 이파리 두어 잎이 삐죽이 내보였다. 걷어낸 옷은 남자 방한복이었다.

“날씨가 이렇게 찬데… 입성이 얇아서…….”

“아니라우. 시금치가 벌벌 떨고 있어서 싸 주었고만이라…….”

그의 손은 어느 새 시금치 무더기에 바람이 들세라 들춰진 방한복 자락을 손으로 꾹꾹 눌러 다독이고 있었다.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얼굴이 얼얼했다. 고층 빌딩 사이로 몰아쳐오는 바람은 살을 엘 듯했다.

“대낮에는 따쉈지라우. 어찌는가 싶어서 비닐하우스를 쬐까 열고 디리다 봤지라우. 시금치들이 쫑곳하니 모다 밭고랑에서 일어서더라고요, 바람 좀 쐬자고. 아, 그리서 나왔잖겄어요.”

부픗하게 쌓인 시금치 낱낱은 나붓한 이파리가 아니었다. 빳빳하게 얼어서 살짝 스치기만 해도 진초록 잎에 실금이 그어지고 여린 잎은 조각조각 떨어져나갔다.

“시금치 다 가져갈게요.”

“이렇게 많은디… 다 어따 쓴다요?”

“식구들이 많아서요.”

“어찐대요, 죄다 얼어부릿는디…….”

금세 심란해지는 목소리였다. 상품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데쳐서 나물로 무치거나 국거리로 끓일 것이니 괜찮다고 말했다. 머뭇거리는 그의 손길을 제치고, 두터운 담요로 둘둘 말아 싸놓은 포대자루를 끌어당겼다. 바닥에 남아 있는 것까지 주섬주섬 담았다.

낱 잎의 푸성귀일망정 어린아이 다루듯 애지중지하고,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를 어찌 한갓 상혼(商魂)으로만 여기랴.

몇십 년만의 강추위라고 했던 기나긴 겨울도 물러갔다. 이 봄 바람 쐬고 싶다는 시금치를 수북이 쌓아놓고, 한 봉지씩 덜어갈 임자를 기다리고 있을 그를 떠올린다. “시금치가 벌벌 떨고 있어서 싸 주었고만이라” 하며 바라보던 순하디 순한 그 눈빛이 아직도 마음에 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