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菊) 선생과 차를 나누며

 

                                                                                        김운하

 

11월도 한참 기울어가던 어느 날, 화단에 심어놓은 국화꽃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전날 밤엔 유난히 달빛이 환했다. 오랜 기다림과 인내 뒤에 마침내 핀 꽃인지라, 그 반가움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나는 거실 바깥 벽 쪽 탁자 위에 올려다놓은 몇 개의 국화 화분들도 다시 살펴보았다. 그런데 소담스럽게 피어 있던 백자색 대국화의 가장자리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당해 화분을 아예 거실로 들고 들어왔다. 물걸레로 흙먼지 낀 화분을 정성스레 닦았고, 청자 문양이 들어 있는 접시에 올려 내가 책상으로 쓰는 교자상 맞은편 자리에 모셨다.

국화를 너무나 사랑했던 옛날의 한 선비는 보름달이 휘영청 뜬 어느 가을밤에 자신이 아끼며 키우던 여섯 개의 국화 화분들을 벗인 양, 술상까지 내놓고 술잔을 돌리며 가을밤의 정취를 만끽했다던가.

나는 술 대신 녹차를 준비해 내놓았다.

한 잔은 국菊 선생에게, 또 한 잔은 나에게. 그리고 또 한 잔은 오늘에야 처음 꽃을 내민 화단에 계신 국 선생을 위하여.

대국 선생 뒤 거실 벽면에는 내가 좋아하는 오래 된 산수 족자가 한 폭 걸려 있다. 그 족자 옆엔 내가 아끼는 고서들과 책들이 쌓여 있는 서재가 있다.

기이한 인연이다. 그 날따라 나는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꺼내 읽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건너편에 마주 앉은 국 선생과 눈을 맞추었다.

네 개의 줄기 끝에 각각 내 손바닥을 활짝 펼친 것만큼이나 커다란 꽃이 한 송이씩 맺혀 있다.

눈부시듯 아주 희지도, 그렇다고 탁한 우윳빛도 아닌, 그 중간의 백색. 백자 달항아리에서나 발견하곤 하던 그 흰빛이라고나 해야 할까. 거기다 꽃잎 가장자리가 보랏빛으로 살짝 물들어가고 있는 자태가 더욱 기이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줄기마다 진녹색 이파리들을 수십 개씩 달고는, 마치 그 수십 개의 팔들을 날개처럼 쫙 펼쳐 곧장 창공으로 비상할 듯한 기상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긴, 국 선생은 옛 선비들이 매화, 난초, 대나무와 함께 군자의 미덕을 상징하던 4군자 중 하나가 아니던가. 특히 가을의 덕의 상징으로서.

나는 상에서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깊은 산 계곡에서 한가롭게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은일 군자가 그려진 고화(古畵)를 배경으로 마주 앉은 국화. 그리고 바로 옆 공간에서 또 다른 운치를 더해 주고 있는 책들. 상 위에 펼쳐진 옛 선비의 책들.

그 풍경을 홀로 완상하고 있자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요동쳤다. 동공이 스르륵 풀어지면서 나와 마주 앉은 국화가 한 떨기 식물이 아니라, 내가 읽고 있던 책의 작가인 청장관 선생인 듯한 환영이 보이는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국화와 대작했던 옛 선비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할 듯하였다.

종회(鍾會)는 『국화부(賦)』에서 국화의 다섯 가지 미덕을 이렇게 말한다.

‘국화는 다섯 가지 아름다움이 있으니, 둥근 꽃송이가 위를 향해 피어 있으니 하늘에 뜻을 두고, 순수한 밝은 황색은 땅을 뜻하며, 일찍 싹이 돋아나 늦게 꽃을 피우는 것은 군자의 덕을 가졌음이며, 찬 서리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것은 고고한 기상을 뜻하고, 술잔에 동동 떠 있으니 신선의 음식이라.’

비운의 시인, 초나라의 굴원(屈原)에게 국화는 정절의 상징이었다. ‘아침에는 목련꽃에 떨어진 이슬을 마시고, 저녁에는 떨어진 국화 꽃잎을 먹는다(朝飮木蘭之墜露兮 夕餐秋菊之落英)’며 국화를 빌어 궁핍한 삶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고절한 기개를 노래했었다.

진나라의 시인 도연명(陶淵明)도 벼슬을 내던지고 향리로 돌아오며 지은 그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세 갈래 오솔길에는 잡초가 우거져도, 소나무와 국화는 여전히 그대로이네(三徑就荒 松菊猶存)’ 하고 노래했었다.

도연명은 유난히 국화를 사랑하였다. 그는 궁벽한 시골에서 고독하게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주 국화에 빗대어 노래했고, 그가 노래한 한 구절의 시구는 수많은 화가들로 하여금 화제(畵題)로 삼게 만들었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꺾어 드니(採菊東籬下)

멀리 남산이 바라보이네(悠然見南山).’

 

시인의 마음과 풍경이 자연스레 일치되는 천하의 명구로 오랫동안 손꼽혀 온 시구다. 곱씹으며 다시 읽으니, 새삼 시인의 마음이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짜안하게 전해져 온다.

나는 생각난 김에 서가에서 세종조의 학자이자 화가, 시인이던 강희안이 저술한 한국 최초의 원예수양서 『양화소록(養花小錄)』을 펼쳐본다. 범석호(范石湖)가 쓴 『국보(菊譜)』 서문을 인용하기를,

 

‘산림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국화를 군자에다 비유하여, 가을이 되면 모든 초목이 시들고 죽는데 국화만은 홀로 싱싱히 꽃을 피워 풍상 앞에 거만스럽게 버티고 서 있는 품격이, 산인山人과 일사(逸士)가 고결한 지조를 품고 비록 적막하고 황량한 처지에 있더라도 오직 도를 즐겨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한다.’

 

또 화암공(花庵公)이 쓴 『화암수록』에서는 꽃들을 9등품으로 나누었는데 국화를 매화, 연꽃, 대나무와 함께 1등품에 등재해 놓았다.

옛 선인들의 ‘화품평론(花品評論)’을 다시 읽으니 그 맛이 지극히 새롭고 깊은 감흥이 절로 일어난다.

그러나 국화에 관련된 수많은 일화며 지식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 송이 국화를 마주하면서 도연명과 같은 시심(詩心)을 불러오거나, 고아한 꽃들을 스승으로 삼는 그 마음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할 바에는 그것들은 한갓 백지 위에 죽 늘어선 검은 먹물의 그림자들에 불과한데.

그리 멀지 않은 때에 나는 우연히 도연명의 시들을 필사해 놓은 아주 아름다운 고서 필사본을 구하게 되었다. 필시 도연명을 흠모했던 어느 선비가 직접 수고로운 손품을 팔아 만든 책일 것이다. 그 선비는 실로 아름다운 필체로 한 수 한 수 시들을 베껴 적었고, 도연명의 초상과 각각의 시와 연관된 그림까지 직접 그려 넣은 품이 이만저만 정성을 기울인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 많은 옛 선비들이 그러했듯 그 시들을 몽땅 다 외우고 있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니, 그 흠모의 정이 넓고도 깊었음을 느끼고도 남는다. 오늘날 어떤 독자가 자기가 흠모하는 작가의 시들을 직접 베껴 책을 만들 정성을 가졌을까.

더구나 시는 문자로 씌어진 것이지만, 그 이전에 시인의 살아 숨쉬는 감정이요 느낌이다. 무엇보다 시라고 불리는 노래 속에는 한 경지에 도달한 이만이 드러낼 수 있는 품격이 담겨 있다. 한 떨기 꽃을 대함에도 옛 선비들의 고아(高雅)한 품격은 꽃을 그저 장식품이나 아름다운 사물로만 볼 뿐인 우리 현대인들의 심성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나는 새삼 이 시대의 비천함과 속됨에 그저 큰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느낄 따름이다. 품(品)과 격(格)을 상실해 버린 시대, 살아 숨쉬는 자연의 미와 시심(詩心)을 상실해 버린 시대, 그저 금전적 속물성과 대중적 범속함만이 출렁대는 지극히 속되고 속된 시대임에랴.

국화의 고매한 운치에 취해 있는 사이에 먹빛 어둠이 찾아들었고, 겨울을 재촉하는 비마저 축축하게 내렸다.

그 날 나는 한 문장도 얻지 못했지만, 국 선생과 마주 앉아 차를 나누니 그 순간엔 세월도 잊고 나도 잊어버렸다. 까짓 한 문장이야 하루쯤 까맣게 잊어버린들 또 어떠리.

 

소설가. <문학사상>으로 등단. 작품집 『그녀는 문 밖에 서 있었다』.

장편소설 『사랑의 피타고라스』, 『언더그라운더』, 『137개의 미로 카드』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