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열매

 

                                                                                         최원현

 

내 책상에는 말라버린 아주 작은 수세미 열매 하나가 놓여 있다. 이제는 무엇인지 잘 구분되지도 않을 지경이지만 나는 그걸 볼 때마다 가슴이 싸한 아픔을 느낀다. 못할 짓을 한 것 같은, 내 게으름과 어리석음이 빚어낸 아픔의 열매처럼 생각이 되어져서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만큼 평범한 진리도 없을 것 같다. 순리의 기본이요 질서의 기본이 되는 말일 것 같다.

그런데 지난 가을 나는 아주 부끄럽고 안타까운 수확을 했다. 갓 태어난 아기 고추만도 못한 수세미 하나를 따낸 것이다. 그대로 더 놔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잎이 다 시들어버렸고 줄기도 말라가고 있는데 그런 데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더욱 가련하고 처량해 보여 차라리 그걸 따내고 만 것이다.

한동안은 내 방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생기다 만, 아니 큰 수세미의 축소판으로 제대로 자라기만 했다면 분명 아주 크고 잘생긴 수세미가 되었을 꼬마 수세미를 바라보며 내 잘못을 몇 번이고 뉘우쳤다.

 

그러니까 지난 봄, 지방의 후배 문인이 수세미 씨를 몇 알 보내왔다. 그러나 도회지 생활이란 게 다 그렇듯 그걸 어디다 심을까 궁리하다가 그만 며칠을 보내버리고 파종기를 지나서야 겨우 사과 상자에 흙을 채우고 씨를 심었던 것이다. 도시의 한 공간에서 수세미가 파랗게 자라 올라가고 거기 탐스럽게 커다란 수세미가 열려 있는 것을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 아닌가.

지각 파종이어서인지 싹이 나는 것은 더뎠다. 그러나 자라기는 그래도 비교적 잘 자라주어 최소한 한두 개의 수세미는 볼 수 있을 것으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줄기와 잎은 제법 튼실하게 자랐는데도 이상하게 꽃이 피지 않은 채 팔월이 가고 구월도 가고 시월이 되었다.

답답한 마음에 백과사전을 뒤져보았더니 수세미 꽃은 7월에서 10월에 핀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면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열매가 아니면 꽃이라도 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며칠 후 드디어 꽃을 피웠다. 여러 송이가 피었다. 한데 피자마자 금방 꽃이 떨어져버리고 그 중 둘만 겨우 남았다. 거기서 수세미 열매가 맺힌 듯싶었다. 하지만 이미 기온은 아침저녁 벌써 쌀쌀해져 있다. 햇볕도 열매가 자랄 만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익게 하는 마무리의 햇볕이었다. 둘 중 하나의 열매가 또 떨어져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어느덧 잎도 노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나 달리 무엇을 어찌 해 볼 수도 없었다. 출근길과 퇴근길에 확인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렇지만 열매는 조금 자라는가 싶더니 더 이상은 커가는 것 같지 않았다. 한두 살 아이 고추만한 크기였으나 생긴 것은 분명 어른 팔뚝보다 굵은 수세미의 형상을 다 지니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것이 즐거움이기보다 안타까움이었다. 동네사람 누구라도 볼까 봐 두려웠다. 농사란 그 되어진 상태로 농부를 헤아린다고 했는데 이 수세미를 보는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도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자라지도 못하면서 시들어가는 넝쿨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더욱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 열매를 따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걸 책상 위에 올려놓고 볼 때마다 파종 시기를 놓친 농부의 마음이 되어 보곤 했다.

 

수세미 씨, 좀 늦게 심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낼 것이었다. 넉넉한 햇볕과 바람과 비가 적당하게 도움되지 못하면 식물은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조건을 무시해 버린 나의 죄는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수세미 씨를 보며 내 삶의 순간들을 생각해 본다. 해야 될 일을 미루어버린 것, 제때에 하지 못해 많은 손실을 보게 되었던 것, 그런 것이 모두 내 탓이었던 것이다. 세상사란 그래도 순리가 주가 된다. 인간이 순리의 틀을 억지로 깨고 있긴 하지만 순리의 힘을 다 꺾을 수 있으랴.

내 방 책상 위의 수세미 열매야말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내 실상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아주 큰 것도, 아주 작은 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지 않던가. 다른 것들을 통해 나를 보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치일 것이다. 늦되고 덜되고 모자람 투성이였을 나의 실체, 그런데도 나는 얼마나 오만하게 그렇지 않은 것처럼 세상을 살아왔을까.

부끄럽다. 자신만만하게 나를 드러내놓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지난날들을 지금의 자리에서 돌아보니 그저 부끄러운 것들뿐이다. 좀더 빨리 뿌렸어야 할 씨들도 많았고, 건사를 보다 열심히 했어야 할 것들도 많았다.

이젠 급해진다. 모든 것을 보다 신중히 해야 되겠고 서둘러야겠다. 할 일을 제때에 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큰 잘못이다. 나는 어쩌면 부끄러운 열매 하나로 지금 가장 큰 수확을 한 것 같다.

 

말라버린 수세미 열매를 손에 드니 아픔인지 슬픔인지 모를 싸함이 가슴을 더 아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