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돌의 무게

 

                                                                                            이경수

 

먼지를 뒤집어쓴 조약돌이 항아리 뚜껑 위에 있다. 처음엔 장독대 바닥에 모아놓았던 것이다. 한데 오가는 발길에 채여 떨어진 것이, 흙 속에 묻혔는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굴러갔는지 갈수록 줄었다. 그래서 항아리 뚜껑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물 속에서 돌이 반짝였다. 하얀색, 검은색, 갈색 그리고 아이 볼살처럼 발그레한 색. 물 속에서 모두 보석처럼 빛났다. 하나씩 건져 손바닥에 놓았다. 손 안에서 물기가 마르자 그리도 곱던 빛깔이 사라졌다. 잘못 골랐나 싶어 다른 것을 건졌다. 마찬가지다.

환상처럼 사라지는 돌 빛. 그 돌 빛은 바닷물과 햇빛의 조화인 것을.

물에서 건진 돌을 손바닥에 놓을 때마다 속는 줄 뻔히 알면서도, 처음 빛이 사라지면 버리고 또 건지고 하기를 계속했다. 그러다 아쉬운 마음에 한 움큼 들고 온 것이다.

그 동안 돌에 마른버짐이 피었다. 바닷물에 던지고 올 걸 괜한 욕심을 부렸나 보다. 생명체는 아니지만 되돌아갈 세월을 기다리는 것 같아 안쓰럽다. 그래도 단단한 제 속성만은 그대로 간직한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입으로 하는 말에 형상이 있다면, 그렇다면 내가 뱉어낸 말은 푸석돌일 거라는 생각에 이른다. 요즈음 자주 말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말이 부쩍 많아졌다. 그래서 실수를 더 하는 것 같다. 어딜 가나 다른 사람보다 말을 더 하려고 한다. 말 욕심에 될 말, 안될 말 토해 낸다. 그리곤 뒤늦게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한 것에 후회한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서, 모자람이 드러나기도 하고 가벼움이 드러나기도 하는 일을 겪는다. 어떤 땐 옹졸함까지 드러난 것을 깨닫는다. ‘차라리 말하지 말걸’ 하며 자신을 돌아보지만 얼굴만 화끈거릴 뿐이다.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하면 알밤 빠진 밤송이처럼 껍데기만 남는 자신을 느끼기도 한다. 마음에서 굴리던 탱탱한 생각도 말해 놓고 나면 바람 빠지는 소리가 되는 것을 어쩌랴.

 

생각이 깊다는 것은 생각이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는 것과 같은 것일 게다. 깊은 생각에서 나온 말은 한 마디로도 감동을 전한다. 하나, 생각 없이 나온 한 마디는 어떠한가.

언젠가 남편과 다툰 뒤, 먼저 사과하고 화를 풀어주리라 하고선 고작 한 말이 “당신과 정말 못 살겠다”였다. 순간 남편 눈초리가 매섭게 올라가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뿔싸, 미처 후회할 틈도 변명할 틈도 없었다. 그때 나는 남편 눈초리가 풀릴 때까지 가슴을 옹그린 채 발꿈치를 들고 다녀야 했다.

말 참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금방 입으로 터져나오려는 말, 그것이 남의 흉일 땐 더 그렇다. 그래서 어쩌다 하고 싶은, 그렇다고 꼭 해야 할 말도 아닌 그런 말이라 하여도 ‘으흠’ 하고 참으면 속에서 꽉 차는 느낌이다.

말을 줄이기로 한다. 참말이라는 것, 아는 만큼 하는 것이고 보면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이렇게 다짐을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을 줄이면 어렴풋이나마 돌 같은 무게를 느낄 수 있어 좋다.

 

조약돌에 묻은 먼지를 후후 불어내곤 두어 개 집어든다. 공깃돌 굴리듯 굴리다 꼭 쥐어본다. 단단한 기운이 손바닥으로 스민다. 조약돌의 단단함. 이것은 아마 파도에 부딪히고 깨질 때 크게 소리치고 싶었을 텐데, 신음조차 내지 않으려고 참고 견딘 만큼의 무게일 것이다.

유리그릇에 물을 담아다 마른버짐 핀 돌을 넣는다. 물 위로 거미줄 그림자가 일렁이자 물 속에서 다시 반짝인다. 하지만 내 안에선 아직 푸석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그리고 또 남편의 말소리도 들린다.

“당신 가끔 생각 없이 말하는 것 알아” 하던 말.

화살처럼 내 양심에 내리꽂히던 말이다. 하늘 같은 남편 말이니 귀담아들으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되레 못 들은 척했다.

이젠 빛깔이 아무리 고와도 물 속 돌을 건지지 않겠다고, 또 한 마디 말이라도 한 번 더 생각한 다음 하겠다고 되새김질을 해 본다. 물 속에서 빛나는 돌도 건져내면 이내 그 빛이 사라진다는 것을, 그리고 마음에 있는 말이라도 하고 나면 속내가 가벼워진다는 것을, 아둔한 머리가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계간 수필>로 등단(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