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宿題)

 

                                                                                         구민정

 

마지막 전동차를 떠나보냈다. 도심 변두리의 역사(驛舍)는 어느 새 선잠에 빠져 있고 어스름한 달빛도 철로 위에 길게 누웠다. 전동차가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정적이 감도는 역사에 아직 서 있다. 밤거리에서 어제를 보내고 또 다른 오늘을 맞는다. 시간은 우리가 애써 쫓지 않아도 전동차의 흔적처럼 절로 그렇게 가고, 또 오고 있다. 시간은 여전히 흘러 궁극적으로 지금의 찰나(刹那)가 억겁(億劫)의 시간이 되고 있었다.

가족들이 깰세라 들고 나갔던 짐 꾸러미는 밀쳐두고 책상 앞에 앉는다. 나만의 작은 공간에 조명을 켜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는다. 암 수술을 받은 지방에 사는 지인의 문병을 다녀온 기분이 체증 가시는 것처럼 개운하다. 마치 해묵은 숙제를 마친 기분이랄까. 시간이 지날수록 미뤄온 일로 마음이 편치 않던 중이었다.

집안 곳곳에 하루를 비운 흔적 선연한데 그 틈새에 반갑잖은 손님까지 와 있다. 안양 호스피스 소식지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소식지는 못 다한 숙제를 확인이라도 하듯, 심사를 불편하게 하곤 했다. 매번 우편물은 개봉되지 않은 상태로 버려졌다. 여느 때처럼 그것을 폐휴지 상자에 넣으려다 궁금증이 일어 열어보았다.

몇 해 전, 늦여름 이야기다. 거리에 걸린 현수막을 통해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를 지원한 적이 있다. 산본을 들어서는 곳에 매트로 병원이 있다. 병원에는 일반 병동 외에도 시한부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암병동이 있다. 살아 돌아가는 자보다 주검으로 실려 나가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곳. 나는 그들의 안식을 돕고자 그곳을 찾은 것이다. 늦더위 기승에 아랑곳 않고 석 달 동안의 실무교육을 받았다. 호스피스로 활동 중인 이들의 체험담을 들으며 봉사자로서의 각오를 다졌고, 유언장을 작성하며 삶을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다. 그런데 막상 임상 실습에 임하려니 두려움이 앞섰다.

사무실에서 환자 배정을 받았다. 텔레비전 화상(畵像)을 통해 진행되는 예배에 맞춰 가톨릭 신자인 나도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내가 맡게 된 환자는 자궁암을 앓고 있는 오십대 아주머니였다. 오랜 병상에 누워 있던 환자는 눈 뜰 기력조차 없는 쇠잔한 모습이다. 감각 잃어가는 환자의 수족을 주물러주자, 미동 없던 아주머니의 무거운 눈꺼풀이 어렵사리 열린다. 지긋이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손끝에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 아마도 내게 보내는 인사이리라. 그 날 나는 어쩌다 한 번 눈을 뜨는 그녀에게 온화한 미소로써 눈인사를 건네는 것 외에 한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어떻게 임상 실습이 끝났는지 별 기억이 없었다.

옆 침대에서 항생제를 맞은 환자가 고통스러워한다.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갈림길에서 노인이 몸을 떨고 있다. 생명이 꺼져가는 소리다. 마치 마지막 전동차의 가물거리는 뒷모습처럼 마른 육신이 가느다란 삶을 놓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한다. 나는 먼발치서 지켜볼 뿐이었다.

보르헤스는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죽음이며, 죽음은 인간에게 시간의 문제로 다가온다’고 했다. 그 말대로 우리가 기다리던 미래는 현재로 다가와 현재라고 생각할 찰나에 이미 과거가 되어 사라진다. 그토록 기대했을 내일이건만, 이토록 긴 고통의 터널 속에서 정지된 시간을 붙들고 있다. 쉼없이 계속되던 인생의 시계추, 그 움직임이 더디다. 이미 죽음 앞에 초연해진 사람들. 그러도록 저들은 얼마나 많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을까.

누구에게나 힘든 때가 있다.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둘째아이를 떠나보내고 아파할 때, 건강이 허락된다면 봉사의 삶을 살리란 소망 하나 키우며 살았다. 멈췄던 시간이 흐르면서 아픔도 치유되었다. 그런데 그 다짐은 현실적인 일에 밀려나기 일쑤였다. 건강이 회복될 즈음 내 이기심의 잣대는 이미 다른 새로운 일들에 대한 욕망으로 기울어 있었다.

실습을 마치고 앞으로의 봉사 여부에 대하여 면담을 했지만, 나는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망설이고 있는 내 마음을 꿰뚫어본 듯, 담당목사님은 마음이 내킬 때 다시 오라고 했지만 앞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 모를 일이었다. 내 마음 속의 빗장은 그때까지도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호스피스의 일은 환우의 고통을 내 것처럼 여기고 보살펴야 하나 내겐 그들을 보듬어줄 품 큰 가슴도, 온기 어린 사랑도 부족했다. 그렇다면 내 안에서 솟구치던 감정들은 모두 가식이었을까. 그로부터 나는 고민에 빠졌고 ‘호스피스’ 자원봉사의 길은 숙제로 남겨두게 되었다.

 

“시간은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다. 하지만 나 또한 강이다. 시간은 나를 잡아먹는 호랑이다. 시간은 나를 태우는 불이다. 그러나 내가 불이다.”

 

보르헤스의 말을 듣노라니 활력이 넘쳐난다. 시간은 인간의 모든 욕망을 잠재운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하지만 그 시간의 주체인 내가 있어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나는 서서히 내 마음 이끄는 대로 곧, 호스피스 사무실에 찾아가 볼 작정이다.

 

<계간수필>로 등단(2003년). 군포여성문학회 동인. 시문회 회원.

『빈혈로 흘러내리는 달빛』 외 다수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