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先妣) 상사(喪事)

 

                                                                                        고봉진

어머니가 몸이 편찮다는 것을 안 것은 돌아가시기까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을 때였다. 12월 초순 생신을 하루 앞두고 막내아우와 함께 고향 집에 갔을 때 어머니는 그 전날부터 배가 자꾸 아프다고 했다. 병원에 갔더니 요즘 유행하는 감기가 복통을 동반한다고 했으니 별 걱정할 것 없다고 하면서도 저녁식사를 거의 들지 못했다. 평소에 몸도 마음도 여간 단단한 분이 아니라 좀처럼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없었는데, 역시 연세가 많아지니 오래간만에 보는 아들들에게 응석을 하나 보다 생각했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어머니는 별 차도가 없어 보였다. 수저도 들지 못하고 생신상을 물리는 것을 보고, 회사일이 바쁜 아우와 덩달아서 떠나왔지만, 여느때와 달라 보이는 어머니 병세가 올라오는 길에서도 계속 걱정이 되었다.

그 뒤 날마다 전화를 해도 어머니가 직접 받지 못하는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점점 더 걱정이 되어 무슨 수를 강구해야지 하면서도 우물쭈물 며칠을 보내고 있는데, 형수가 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오늘은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라고 해서, 큰 병원에 왔는데 여기서도 더 큰 도시 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편이 좋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놀라서 그 날로 아우와 함께 급히 시골로 내려갔다.

담당 의사는 그동안의 검사로 대략 결론을 얻은 모양이었지만, 확실한 진단을 내리기에는 자기들 장비에 한계가 있다며, 소견서를 써 줄 테니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길 것을 다시 권유했다. 그 날 당장 어머니를 차 뒷좌석에 눕게 해서, 서울로 달려와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밤 늦도록 각종 검사를 7시간 정도 받았는데 자정이 가까워 뜻밖에 혈액종양내과 병실을 배정받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새로 담당을 하게 된 주치의가 와서 이미 환자에게는 어떤 치료도 무의미하다는 말을 했다. 옛날 같으면 노환이라는 이름으로 넘어갈 경우일는지 모르지만, 요즘 첨단 의학으로는 여러 가지 병환이 겹친 것으로 확실한 진단은 나왔는데, 그 놀라운 기술로도 아무런 손도 쓸 수가 없다는 상태라니 기가 막혔다. 더구나 배설 기능이 완전히 정지해 버려서 영양을 링거로 공급할 수도 없다며, 아무것도 해 드릴 것이 없으니, 환자가 더 편한 상태에서 임종을 하시도록 해 드리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며 퇴원을 권고했다. 그렇다고 당장 퇴원 수속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병원이 말기 중환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는 일을 해 줄 수 있으리란 기대를 지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가운데도 정신은 말짱했다. 자기가 처한 사정을 훤히 짐작한 것인지 입원 후 4일이 지나자 병원 침대가 불편하다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 날 밤  나는 사실상 어머니의 유언이 되고만 말씀을 들었다. 5년 전부터 어머니는 형수와 함께 어떤 새 종파에 속하는 기독교 교회에 입신해서, 아버지 제사를 그 교회가 주장하는 추모식 형태로 바꿨었다. 그 처사에 서울의 아우와 나는 불만스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제사를 지내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한 우리의 속마음을 잘 알면서도 어머니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교회 식으로 모든 것을 치러 달라고 당부를 했다. 형수의 권고로 마지못해 동조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던 어머니의 신앙이 무척 확고하다는 것을 그 날 밤에야 새삼스럽게 확인을 한 셈이다.

날이 밝자 어머니는 거듭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더이상 연말의 어수선한 병원에서 간호사가 매시간 실시하는 측정을 받으며 불편한 입원생활을 계속하도록 만류할 도리가 없었다.

병원에서 약을 한 달치 정도 조제해 주었기 때문에 막연히 그 정도는 어머니가 지탱하리라고 생각했다. 시골집에서 무작정 그냥 머무는 것이 주위에 오히려 어머니의 조속한 운명을 기다리는 모양으로 비칠 것 같기도 했다. 연말연시에는 인사를 다녀야 할 곳이 많은 편이다. 새해 인사만 치르고 바로 내려오겠다며 그래도 그 며칠 동안을 걱정스러워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급하면 전화를 걸도록 하겠다며 맑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어머니하고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초하루 막 세배를 나섰을 때 어머니 상태가 갑자기 더 나빠지신 것 같아 병원의 구급차를 불렀다는 형수의 전화를 휴대전화로 받았다. 곧이어 아우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어머니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었다는 형수 전화를 막 받았다는 전갈을 해 왔다. 시각은 아침 10시였다. 새해 하루가 밝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미수(米壽)를 채운 셈이었다.

시골로 달리는 차 중에서 다른 차로 뒤따라오는 아우의 전화를 받았다. 형수에게는 나보다는 동생이 스스럼없는 상대이다. 형수가 직접 상의를 했는지 어머니 장사는 아무래도 형수가 하자는 대로 교회 식으로 지내자고 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벌써 장례식장 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평소에 어머니가 거처하던 안방에 걸려 있던 사진이 재빠르게도 빈소에 놓여 있었다. 미소짓고 있는 그 영정 앞에는 성경책 한 권만이 달랑 펼쳐져 있었다.

25년 전 아버지 상사 때는 우리로 하여금 무리하게 3년 상을 치르도록 하였던 그 완고한 집안 어른들은 한 분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존명을 기대할 연세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 형제는 교회의 이의를 무릅쓰고 아버지 상사 때 입고 갈무리 해 두었던 상복을 찾아오게 해서 걸치고 문상객을 맞았다. 2박 3일 동안 상식(上食) 같은 것은 한 번도 차리는 일이 없었지만, 선산 밑 도로에서 산소까지 운구에는 상여를 고집했다. 아버지 묘 옆에 쌍분으로 미리 마련된 가분묘에는 석곽이 묻혀 있어서, 지관이 까다롭게 향을 잡을 일도 없었다. 나머지 산역(山役)은 당연히 교회가 주관을 했다.

그렇게 치른 장례였는데도 사회의 현역으로 이번에 가장 많은 조문객을 맞았던 막내아우는 굳이 ‘계상(稽顙) 재배언(再拜言) 금반(今般) 선비 상사(先妣喪事) 시에는’ 하는 집안 전래의 고풍스러운 문구로 시작하는 ‘답조장(答弔狀)’을 일일이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