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그랬지

 

                                                                                               홍혜랑

영화가 끝났는데도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는 사람이 나뿐이 아니다. 오랜만에 진품의 영화를 보았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폴란드 영화 ‘피아니스트’는 나치 치하의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실재 인물의 전기영화다. 유대인인 주인공 스필만은 폴란드 국영 방송국의 전속 피아니스트였다.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만 살아남은 기적이 자신의 선택이 아닌 신의 선택이었지만, 살아남은 것 자체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오랜 세월 침묵하고 살다가, 지난 2000년 90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기 얼마 전에야, 60여 년 전 자신의 빠삐용 적 체험을 아들에게 들려줌으로써 그의 증언은 영화로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는 바르샤바 시내 곳곳에 숨어 있던 유대인들을 모조리 솎아서 시내의 한 광장에 집결시켰다. 스필만이 가족들과 함께 유대인 군상 속에 끼어 죽음의 집단수용소로 떠나는 기차에 오르는 순간, 역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한 폴란드 친구가 스필만의 얼굴을 알아보고 극적으로 구해낸다. 짐짝처럼 기차에 실려간 스필만의 가족들은 나중에 모두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희생되었다고 전해진다.

폴란드 친구의 기지로 기차역을 빠져나온 스필만은 폭격당한 어느 저택의 잔해더미 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생존의 한계상황에 이르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서 호랑이를 만나듯, 마침 순찰 중이던 한 나치 장교가 이 젊은 유대인 앞에 나타난다. 절망의 순간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나치 장교는 권총을 들이대는 대신, 깊고도 슬픈 눈으로 이 가련한 생명을 응시한다. 죄 없는 이 젊은이와 자기 자신은 똑같이 전쟁의 희생물이라는 탄식이 역력했다.

겁에 질릴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은 스필만이 자신은 유대인이며 피아니스트라고 대답하자, 장교는 폭격당한 저택의 잔해 속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피아노 뚜껑을 열며 연주할 것을 명령한다. 명령이 아니라 연주의 기회를 허락한다. 생명이 꺼질 듯 기진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릴 때는 굶주린 사람이 아니다. 얼마나 기다리던 생명의 포효인가. 퀭하게 십 리나 들어간 눈, 뼈만 남은 사지로 음악 혼을 불태우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보면서, 나도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가슴 찡하게 고마웠다. 인간이 숭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저 예술가가 소유한 마지막 자유의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교자의 순교가 그 자유의 정점이 아닐까.

전쟁이라는 한계상황 속에 갇힌 한 피아니스트의 예술 혼을 참으로 깊디깊은 샘에서 밀도 있게 퍼올린 영화였다. 이 영화를 ‘쉰들러 리스트’의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라고 한 평론은 맞다. 주인공 피아니스트의 형형한 영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관객이 있을까.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그의 육체는 오로지 예술 혼을 담기 위한 그릇이란 말인가.

생명의 촛불이 꺼질 듯 말 듯한 혼미 속에서도 오롯이 정신에게 순종하며 피아노의 건반 위를 펄펄 나는 육체의 손가락은 그러나 아무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나에겐 이 감동적인 장면보다 더 잊혀지지 않는 장면 하나가 또 있다. 그것이 오래도록 또렷하게 기억되는 건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닐 터다. 기억은 대상에 투사(投射)된 자기 자신의 속내인지도 모른다.

바르샤바 광장으로 끌려나온 유대인 포로들의 인파 속은 글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생존을 위해서 먹을 것을 빼앗고 빼앗기는 격투는 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 와중에 젊은 여인 하나가 실성한 듯 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 끊임없이 울음 섞인 절규를 반복한다.

“내가 왜 그랬지. 내가 왜 그랬지.”

무엇을 그녀가 잘못 했단 말인가.

나치의 눈을 피해서 지하실에 숨어 있던 젊은 엄마는 게슈타포의 구둣발 소리를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우는 아기의 입을 틀어막았다. 여린 생명은 질식했고, 끝내 발각되어 광장으로 끌려나온 여인이었다. 아기를 숨지게 한 어머니의 절규는 실성한 여인의 지껄임이 아니다. 비록 순간적이긴 했지만 아기의 입을 막은 행동은 동물의 조건반사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스필만이 아사(餓死)의 한계상황 속에서 선택한 영혼의 자유만 자유가 아니라, 윤리적 회한과 자책으로 평생 가슴을 멍들게 할 어미의 불행한 선택도 자유가 저지른 일이다.

한순간의 선택이 영원토록 자신을 부자유롭게 한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는 결국 인간에게 부자유의 올무를 씌우는 함정이 될 뿐이 아닌가. 오죽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선택의 자유는 너무나도 연약한 인간에겐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라고 했을까. 순간에 이루어지는 선택, 그 자유로운 선택으로 인한 끝없는 고통, 그것은 전쟁 속에서만,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삶이 번뇌요 고행인 까닭도 생각해 보면 끊임없이 우리에게 강요되는 선택의 자유에 있을 것만 같다.

구원이란 인간의 의식을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지평으로까지 끌어내려서, 신이 인간의 선택에 직접 관여해 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절규는 그대로 나의 소망이기도 하다.

냉장고를 선전하는 TV 광고에선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지만 삶 속에서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나의 선택은 10년이 아니라 영원과 맞닿아 있다고 믿어지기에 세월이 흐를수록 자유가 짐스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