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짓는 법

 

                                                                                              鄭木日

웃음과 미소는 비슷한 듯하지만 사뭇 다르다.

웃음은 소리내며 기쁨을 드러내지만, 미소는 입가에 잔잔한 표징을 띨 뿐이다. 웃음은 속내를 다 보여주지만, 미소는 베일 속에 보일 듯 말 듯하다. 모나리자의 미소,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의 미소는 기쁨일지 슬픔일지 분간하기 어렵다. 알 수 없기에 신비와 여운을 주고 보고싶어진다.

미소는 명상의 끝에 피어나는 꽃이 아닐까. 환희나 기쁨만이 아닌, 극한의 슬픔과 고통까지를 포함한 깨달음의 표징이 아닐까. 생각의 꽃이 핀 것이 미소일 듯싶다. 흰 치아를 드러내는 웃음은 만개한 꽃 같다. 생각의 심연에서 알 듯 모를 듯 입가에 피운 미소는 반쯤 핀 꽃봉오리 같다.

미소는 사유의 깊이에서 피어난 깨달음의 꽃일까. 대상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과의 대화와 오랜 화두 속에서 문득 웃음이 떠오른 것이 아닐까. 웃음이 아닐지 모른다. 슬픔의 승화이거나, 슬픔 그 자체를 껴안아 고요 속으로 옮겨놓은 마음이 비춰진 게 아닐까.

웃음은 환희나 즐거움에서 저절로 표현되는 것이지만, 미소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꽃이다. 냉소와 조소 등도 소리나지 않은 웃음이지만 평온하지 못하다. 얼굴이 찡그려지고 여유와 맑음이 없다.

미소는 웃음처럼 단숨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짐승들은 울기는 하지만 웃지를 못한다. 웃을 줄 아는 건 사람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웃을 순 있지만 미소짓기는 어려운 일이다. 웃거나 운다는 것은 두 가지 극단이다.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다. 미소는 중도에서 일어나는 게 아닐까. 기쁨과 슬픔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눈물의 슬픔과 행복의 웃음을 동시에 갖고 있다.

미소는 단순한 웃음이 아니다. 기쁨도 아니며 슬픔도 아닐 듯하다. 희비애락을 다 포용한 것이어서 신묘하다고나 할까. 그것은 웃음의 연장이며 슬픔의 깊이이다.

잠자는 아기에게서 미소가 피어나는 걸 본다. 아기에겐 기쁨과 슬픔도 없다. 울기는 하지만 고통과 환희를 모른다. 탄생과 죽음, 찰나와 영원도 없을 것이다. 맑고 텅 빈 하늘 같아서 미소를 띨 수 있을 것이다. 아기는 과연 어느 세계에서 온 것인가.

전남 화순에 있는 운주사엔 수백의 석조 불상이 있다. 나는 미얀마의 한 황금 사찰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지에서 수많은 부처들을 보았다. 좌상(座像)이나 입상(立像)을 불문하고 입을 벌려 웃는 부처는 없었다. 미묘한 차이를 보여주지만 모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웃음은 순간이지만 미소는 깨달음이며 영원을 말하고 있었다.

부처의 얼굴에서 행복과 슬픔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 그의 표정에선 축복이 흘러나오면서 또한 깊은 슬픔이 있다. 그는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졌지만, 고통 속에 사는 중생들의 삶을 보면서 기쁨에 잠길 수만은 없었다.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할 수 없어 비소(悲笑를) 띠고 있는 듯하다. 누구나 울고 괴로워하며 한탄할 수 있다. 호탕하게 웃으며 떠들 수도 있다. 그러나 고요한 미소를 짓기란 어렵다.

미소는 마음 속에서 짓는 웃음이다. 소리로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을 비워야 지을 수 있다. 웃음과 슬픔이 만나서 만들어진다. 울거나 웃거나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미소는 자신을 완전히 버릴 수 있어야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을 평온하게 자연스런 상태로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지을 수 있다. 깨달은 이에게는 생사, 그 자체의 경계가 사라진다. 희비애락(喜悲哀樂)의 감정과 마음이라는 관념의 그림자도 벗어버린다. 만약 미소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미 그것을 초월한 것이다.

미소는 깨달음의 꽃이며 죽음을 초월하는 경지가 아닐까. 한계와 경계를 허물어 대자유를 얻은 영원의 표정이 아닐까. 마음마저 벗어버려야 띄울 수 있는 아름다움! 거울을 보면서 이따금 미소짓는 흉내를 내본다. 은연중에 무엇을 바라고 욕심이 들어 있다. 무심으로 띄우는 미소와는 너무나 멀다.

나는 어떻게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