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긴 만남의 이중주

 

                                                                                           심규호

시인 윤동주(1917~1945)를 만나기 위해 나와 일행은 동지사(同志社) 대학을 거쳐 그가 투옥되기 전 마지막으로 소풍왔다던 우치가와(宇治川) 아마가세바시(天ヶ瀨橋)로 향했다.

이곳까지 우리를 데리고 와서 한 송이 꽃을 손에 쥐어주고 함께 강물에 던지기를 요구했던 이는 ‘시인 윤동주를 사모하는 교토 일본인의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혼타니 씨였다.

윤동주가 1943년 초여름 대학 동기생들과 함께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는 그곳에서 엉성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은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야마모토 센지(山本宣治 : 1989~1929)의 기념관으로 갔다.

꽃을 좋아하여 자신의 저택 이름을 하나야시끼(花やしき)라고 불렀다는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일본 성性교육의 본류를 개척한 학자이자 민중과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 무산계급 해방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야마모토 센지, 마냥 낯설기만 한데, 우리는 왜 그를 찾아가야만 했나? 의문은 곧 풀렸다. 벨기에 대학 교수 출신으로 야마모토 센지를 존경하여 그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는 쿠라오카 선생은 그가 제국의회에서 치안유지법을 개악하는 데 반대했다는 이유로 극우조직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치안유지법, 윤동주를 사상범으로 몰아 결국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게 만든 악법, 바로 그것 아니던가? 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 앞에서 잠시 멍해졌다. 멀리 평등원(平等院-일본 돈 1엔짜리에 새겨진 유명한 박물관)이 바라보이는 우치 현의 아름다운 가을 공원에서 나는 엊그제 마쓰모토 성을 스쳐지나 도착했던 사토야마베(里山邊)의 지하 공장`─`일제시대에 징용한 한국인들이 팠던 바로 그 동굴을 생각하고 있었다.

윤동주와 야마모토 센지의 만남. 우리는 누구를 만나 친구가 될 것인가? 어쩌면 한일 우정 문화교류라는 이름으로 제주 두루나눔이 일본 공연을 나선 것 또한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10월 29일 오후 나고야 공항에 내려 곧바로 올라탄 버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원령공주의 무대가 되었다는 고마가다케(駒ヶ岳)를 옆에 끼고 나가노 현 마쓰모토(松本)를 향해 달려간다. 도착 예정시간인 9시를 훨씬 넘긴 시각 검은 하늘에 늦가을 차가운 비가 내리는데,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이윽고 마쓰모토 대학 교정에 들어선 버스의 헤드라이트에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사람들. 옹기종기 모여 우리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 오늘 밤 우리들의 홈스테이를 맡은 렉스히포(Lexhippo) 마쓰모토 회원들이었다.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새롭게 조직된 32명의 ‘마쓰모토 공연 실행위원회’ 속에는 신주도래인(信州渡來人) 구락부의 세화인(世和人)인 최천황 씨를 비롯한 몇 분의 재일동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이 준비한 공연에 맞춰 일본 다이고(太鼓)나 오도리(踊り), 재일동포 학생 풍물패의 공연을 마련하여 문화교류의 격식을 갖추는 한편 이를 마을 축제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풍물과 탈춤 사이에 고사(告祀)가 행해졌다. 박창희 선생님과 함께 초헌관으로 등장한 마쓰모토 대학총장은 고사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산과 강, 바다와 평야, 마을과 집의 신에 대한 경배가 사라진 세상, 그것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경외와 감사의 실종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문명비판이 아니라 모든 천지신명의 권세를 통합한 덴노(天皇)에 대한 일갈처럼 들렸던 것은 어인 일인가?

“잡귀 잡신은 물알로 만복은 백성에게.”

마침내 갈망과 축복의 비나리와 더불어 풍물 소리가 진동하고 겅중겅중 뛰어나가는 단원들 뒤편에서 나는 찡하는 가슴을 추스르고 있었다. 풍물이, 내치고 휘감고 움켜쥐었다가 어느 새 풀어버리고, 감싸 오르다 툭 떨어지며, 산산이 흩어지다 휘몰아 한데 몰아치니 천지만물 또한 온몸으로 소리를 타고 넘실넘실 출렁인다. 연이어 봉산탈춤, 왜 하필이면 봉산탈춤이냐고 누군가가 물었다. 그것은 젊음의 춤이었다고, 1970년대와 80년대 독재와 분단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몸짓이었다고, 그리하여 어느 새 상징이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공연이 끝나고 서로 어울리는 마당은 언제나 흥겨움으로 넘실댄다. 소리와 몸짓이 있는데, 어찌 흥이 나지 않을 수 있는가? 잠시 너와 나를 잊을 수 있음이다.

뒤풀이는 신촌新村 공민관에서 열렸다. 일종의 마을회관인 그곳 아담한 2층에서 열린 뒤풀이에서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과 더불어 자리를 마련하였다. 가족사진을 스크랩하여 한국말로 더듬거리며 소개하는 아이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어머니. 인구 50만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의 아이들, 그들의 부모가 마련한 공연에서 자신들의 악기로 화답하던 아이들, 사실 이번 공연은 바로 그런 아이들을 위해 바친 것이기도 했다.

뒤풀이가 끝날 시간이 되었다. 아쉬웠다. 그러나 이제 함께 온 어린아이들이 돌아가서 잠자야 할 시간이었다. 우리들의 미래는 바로 저 아이들에게 달려 있는데, 마땅히 그들 시간에 맞추어야 하리. 다음에는 우리 아이들도 함께 데리고 오겠노라고 작심한다.

 

눈이 부시도록 화창한 아침이다. 어두운 밤하늘 위로 모닥불 타오르고 풍물 소리 요란했던 어제의 황홀했던 놀이마당은 이미 깨끗하게 정리되고 새벽까지 이어진 뒤풀이로 뻐근한 뒷덜미를 매만지며 우리는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짐을 챙겨 넣고 있었다.

9시,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어느 사이엔가 모여든 모미지료(紅葉寮)와 아자미료 식구들이 우리 앞쪽에 두 줄로 도열했다. 잠시 후 모미지료 요장(寮長)인 이노우에 선생의 송별 인사가 있었다. 약 1백여 명에 달하는 지적장애인(知的障碍人)과 함께 시가(滋賀) 현 사회복지법인 오오키가이(大木會)의 모미지료를 담당하고 있는 작은 키의 중년인 그는 어제 우리의 공연에서 여러 사람들이 거의 열광적으로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을 보고, ‘혼모노(本物) 간의 만남’이라 말했다. 이는 복지법인에 함께 하고 있는 대다수 중년의 지적장애인들이 비록 지적 장애를 겪고 있기는 하지만 심성은 진실하다는 그의 확신을 전하는 말이자, 어제 풍물과 탈춤을 통한 우리들의 마음이 그네들에게 전달되었음을 확인시켜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끄러웠다. 지능지수가 5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던데, 혹시라도 무턱대고 튀어나와 공연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탈춤이나 풍물을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으니 오히려 그들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아닌지? 국내에서 한번도 이런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던 우리가 지레짐작하여 이렇게 생각하였으니, 부끄러움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부끄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이번 만남이 지속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잠시 후 그들의 화답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친구가 되기 위하여’ 부끄러운 듯 때로 일그러지기도 하는 모습으로, 그러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그들의 노래는 그렇지 않아도 화창한 햇살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우리를 아예 눈감게 만들었다. 슬며시 내리는 눈물.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공연 장소였던 교토 히가시쿠죠(東九條)에서 우리는 화태고(和太鼓-일본 전통 북놀이)와 사물놀이의 교묘한 만남을 경험했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빽빽한 일정에 따라 진행되는 제12회 히가시쿠죠 마당은 절반의 재일동포와 절반의 일본인들이 함께 어울려 만드는 화합의 장소이자 해방의 장소였다.

“한국·조선인, 일본인이 같이 주체적으로 참가하며 제각기 참다운 자기 해방과 상호 교류를 깊이 하는 마당을 만듭시다.”, “서로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마음을 나누며 노래하고 춤을 추는 즐겁고 활기 있는 마당으로 해 나갑시다.”

히가시쿠죠 마당 실행위원회의 취지문은 왜 윤동주와 야마모토 센지가 만나야만 했는지, 우리가 왜 일본에 와서 소리와 몸짓을 전달해야만 했는지, 모미지료 식구들은 왜 우리들에게 ‘친구가 되기 위하여’를 불러주었는지 답해 주고 있었다. 아주 조그마한 소리로 그러나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거대한 울림으로.

 

<계간 수필>로 등단(99년). 제주 포럼 대표.

제주산업정보대학교 중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