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

 

양주동(梁柱東)

 

'사랑은 눈 오는 밤에'

 

일시:2005년 2월 19일

장소:수필문우회 회의실

참석 인원:문우회 및 계수회 회원 25명

사회:김병권

정리:최순희

 

 

<본문)

 

사랑은 눈 오는 밤에

─ 爐邊雜記 ─

 

 

사랑은 겨울에 할 것이다`─`겨울에도 눈 오는 밤에. 눈 오는 밤이어든 모름지기 사랑하는 이와 爐邊에 속삭이는 행복된 시간을 가지라. 어떤 이는 사랑이 나란히 걷는 중에서 생장한다고 말하여 혹시 봄밤에 꽃동산을 기리고 혹시 가을날의 단풍길을 좋다 하지마는, 나는 단연코 雪夜의 爐邊을 주장하는 자이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사랑은 시간을 초월한다 하더라도 겨울밤의 기나긴 것은 어느 편이냐 하면 둘의 마음을 든든케 할 것이요, 더구나 爐邊의 그윽한 情調와 조용한 기분이며 雪夜에 다른 來訪者가 없으리라는 自信이 서로의 마음을 가라앉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禪과 같이 침착하고 태연하고 悠悠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첫사랑은 나의 주장대로 雪夜 爐邊에서 고요히 말없이 행하여졌다. 일찍이 저녁을 마친 뒤에 방안에 흩어져 있는 약간의 書籍을 정리하여 書架 위에 올려놓고, 책상 위에는 水墨빛 난초 한 盆을 장식하여 놓고, 차를 다리기 위하여 화로에 불을 젓노라니, 가슴이 저윽이 설렘을 느낀다. 그러나 시계는 죽어도 쳐다보지 않기로 한다. 나오는 줄도 모르게 입속으로 뜻없는 노래를 한두 절 읊조리고 있노란즉, 厥女의 발자국 소리가 창 밖에 들려오지 않는가… 厥女는 나의 방문을 나직이 두드릴 만큼 그 침착한 品位를 잃지 않는다.

주인은 말없이 일어나 來訪者의 망토자락의 눈을 조심스럽게 털었다. 뜰 안에는 사분사분 내리는 눈이 벌써 한자나 쌓였다. 厥女는 망토를 벗고 말없이 화롯가에 와서 단정히 앉는다. 그러나 厥女는 말이 없다. 주인도 별로 할 말이 없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고요함을 두려워하여 날씨가 매우 추우니, 눈이 무던히도 많이 오느니 한다 하자. 그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일이 아니냐. 하물며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하소연하는 무슨 말이랴. 우리 사이에 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새로운 사실이거나 새로운 敎養임을 요한다. 이제 새삼 다시 무엇을 말할 수 있으랴…….

그러나 사랑은 결국 坐禪은 아니리라. 그들은 애써 무슨 신통한 對話의 실머리를 찾고자 애쓰다가 필경은 무슨 평범한 일에서 端緖를 발견하여 최초의 難關을 돌파하리라. 그담부터는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다. 그들은 혹은 땅콩을 까며(아니 군밤이던가?) 혹은 초콜릿을 벗기며, 차를 마시며 그리도 할 말이 많다. 밤은 길대로 길고, 눈은 끊임없이 내린다. 가다가 혹시 말이 끊겨져야 할 고비에 이르면, 둘 중에 하나이 화로에 놓인 부젓가락을 들어 재 위에 무슨 간단한 單語나 말을 써도 좋다. 무심코 재 위에 무슨 글자를 썼다가 제가 쓴 것에 제가 놀라, 또는 저 편이 볼까 하여 도로 얼른 부젓가락으로 지우고 마는 心思! 사람은 이러한 微妙한 情緖의 경험을 위하여 구태여 그의 애인을 여름날 멀리 바닷가로 데려가지 않아도 좋다. 화롯가의 재는 이 경우에 바로 바닷가의 모래이다. 이리하여 겨울밤은 깊은 줄도 모르게 점점 깊어간다…….

사랑은 아무래도 雪夜 爐邊에서 할 것이다. 무릇 사랑에는 두 가지 典型이 있으니, 하나는 前例의 第一場과 같은 벙어리의 사랑`─`일찍 칼라일이 에머슨과 만났을 때 無言으로 손을 쥐고 無言 중에 半時를 對坐하였다가 無言으로 다시 손을 쥐고 나뉘었다는 逸話가 있거니와 사랑하는 남녀도 종종 ‘첼시의 賢者’와 ‘콩고오드의 哲人’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드디어 第二場과 같은 지껄이는 사랑`─`이 경우에는 끊임없이 속삭이는 그들의 對話가 어느덧 雪夜를 잠깐 지나 雪朝에 이르고야 말 것이니, 그들 사이의 작별의 인사는 필연적으로 듣기에도 섭섭한 good night이 아니요, 쾌활하고도 신선한 good morning이 될 것이다. 일찍이 셸리는 才子였건만, 이러한 妙諦를 몰랐기 때문에, 내가 그 날 밤 무심코 종이 위에 그적거렸던  ‘Good Night’이라는 詩를 지었겄다.

 

‘굿나잇’이라고요? 아아 천만에,/ 합할 이를 나누는 밤은 언짢은 밤./ 가지 말고 조용히 앉아 계시오,/ 그래야 그게 참으로 좋은 밤이요.//

그대의 인사는 천사같이 아름다우나/ 내 어찌 쓸쓸한 밤을 좋다 이르리?/ 그런 말, 생각, 理解, 모두 말아야./ 그래야 그게 참으로 좋은 밤이죠.//

 

셸리의 안타까운 good night의 情景이 하필 雪夜 爐邊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가 만일 로맨스를 사랑하였다면, 그는 응당 나와 같이 그것들을 택하였으리라. 설야는 몰라도 적어도 영국의 詩人이면 爐邊을 사랑할 줄 알 것이니, 저 워즈워드도 사랑스러운 ‘루우씨의 노래’ 중에서 노래하지 않았는가.

 

너의 山 속에서 나는 참으로/ 사랑의 기쁨을 느끼었노라./

나의 사랑하는 그녀는 영국식/ 불 옆에서 물레를 돌리었노라.//

 

여기서 ‘English fire’라 함은 무론 그가 영국風의 爐邊을 자랑삼아 그렇게 노래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湖畔의 大詩人도 역시 爐邊의 사랑을 즐기지 않았는가`─`시골 처녀와일 망정.

 

 

 

사회 : 안녕하십니까. <계간 수필> 제40호, 2005년 여름호를 위한 합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 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무애(无涯) 양주동 선생의 수필 ‘사랑은 눈 오는 밤에’를 합평에 올렸습니다. 일찍이 ‘인간국보’로 알려진 양주동 선생(1903~1977)은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황해도 장연에서 성장했습니다. 다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익힐 정도로 천재성을 보이기 시작하여 열 살 무렵 사서삼경 중 대학을 읽었으며, 중동중학교 고등속성과에서 1년 만에 전 과정을 이수, 검정고시를 통해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합니다. 거기서 춘원 이광수와 노산 이은상 등과 교유하며 문학에 심취하게 되는데, 생존시 그분이 우리의 뇌리에 새겨놓은 박학다식·기인괴벽의 이미지는 너무나도 유명하여 백인백론의 논평으로도 부족하다 하겠습니다.

국·영문학자로 동국대·연세대 교수를 역임한 선생은 신라 향가와 고려 가요 등 한국 고가를 연구하여 『조선고가 연구』, 『여요전주』 등의 역저를 펴내어 초기 국어학계에 큰 업적을 남기는 한편, 시인·수필가·평론가·번역문학가로서 천의무봉의 필력을 구사했던 분입니다. 그 중에서도 수필을 무척 좋아하여 수필가라는 직함을 남달리 자랑스럽게 사용했지요. 그가 생전에 발표한 수필은 1백여 편에 이르며, 수필집으로 『문주반생기』(1959)와 『인생잡기』(1962)를 남겼습니다. 1958년에 발간된 대학교수 수필집에는 오늘 합평작품을 비롯, 모두 6편이 실려 있습니다.

오늘 지정토론은 김형진·염정임·이태동 선생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먼저 김형진 선생께서 주제에 대해 말씀을 시작해 주십시오.

김형진 : 양주동 선생은 대학 시절 국문학 전공인 우리에게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지만 박학다식하나 가벼운 분이라는 선입관이 있었는데, 이 작품도 좀더 깊이 있는 무언가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글의 주제는 ‘사랑은 겨울에 할 것이다’라고 한 첫 단락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겨울밤은 길고, 조용하고, 특히 설야에는 다른 내방자가 없어 서로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이라 했지요. 둘째 단락 이후에선 첫 단락을 심화 고조시키면 더 좋았을 터인데, 범위를 넓혀가기만 하고 또 다소 자기 과시적으로 흐른 아쉬움이 있습니다.

염정임 : 이 글은 수필집 『인생잡기』에 실린 것으로 1936년도 작품입니다. 양주동 선생은 앞서 소개해 주신 것처럼 우리 고가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국문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평소의 야망은 오로지 불후의 문장에 있었으매, 시인·비평가·사상인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작품 역시 좋은 문장과 좋은 수필을 생각하며 쓴 글로 보입니다. 문체는 사랑이라는 주제에 맞게 시종 부드럽게 소곤거리는 듯이 글을 이끌어가지요. 사랑은 겨울에 할 것이라는 포괄적인 제시로 시작하여 점점 세밀하게 겨울에도 눈 오는 밤에, 그것도 난롯가에서 사랑을 속삭이라고 합니다. 마치 눈이라도 오고 있는 듯이 독자들에게 작가와 같은 애틋한 정조를 불러일으키지요. 또 봄날의 꽃동산, 가을날의 단풍잎, 겨울 눈 오는 밤의 노변 등 이미지의 산뜻한 대비를 통해서 더욱 선연하고 참신한 그림을 그려 보입니다. 넷째 단락에 ‘구태여 그의 애인을… 화롯가의 재는 이 경우에 바로 바닷가의 모래이다’라는 문장의 비유는 매우 빼어난데, 이 빛나는 문장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은 성공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 작품과 관련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동향의 소설가 강경애와의 연애 이야기입니다. 와세다 대학 예과 불문과에 다니다 시 전문지 <금성>을 발간하고(1923) 일시 귀국한 선생은 고향 장연읍에서 강연 중에 당시 평양 여학교에 다니던 강경애를 만나 열애에 빠집니다. 일 년간 동거하다 두 사람은 헤어지고, <금성>은 폐간되고 양주동은 동경으로 떠나 와세다 대학 영문과 본과에 입학하게 되지요. 그의 나이 22세 때의 일인데, 이 글을 쓴 것은 1936년이니 그로부터 약 12년 뒤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수필은 첫사랑과의 어느 하루 저녁을 회상하며 쓴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에 ‘궐녀’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예전의 신소설에서는 3인칭을 말할 때 ‘궐녀’, ‘궐자’ 등을 썼지요. 김동인이 ‘그’ 또는 ‘그녀’를 처음으로 썼고요, ‘궐녀’라는 말은 나중에 전광용의 『까삐딴 리』, 채만식의 『냉동어』, 현진건의 『고향』 등에 다시 쓰였고, 최근에는 김주영이 『객주』에서 쓰고 있습니다. 뒤에 영시를 인용한 것은 문학적 지식의 과시라기보다는 영문학자로서 셸리와 워즈워드가 자연스레 떠올라 인용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셸리의 ‘Good Night’이란 시는 못 찾았으나, 워즈워드의 시는 ‘미지의 사람 속을(I Travelled Among Unknown Men)’이란 시에 나오는 구절이더군요. 깔끔하고 산뜻한 수필 한 편 잘 읽었다는 느낌입니다.

이태동 : 문학작품 특히 수필을 읽는 것은 조용한 가운데 어떤 시적인 감동을 얻기 위한 것 같습니다. 그 소재가 낯선 경험을 다룬 것이고, 또 주제가 도덕적으로 교훈적일 때 감동을 주지요. 저는 찰스 램을 참 좋아합니다. 그의 수필 ‘차이나’는 빼앗긴 가난 이야기인데, 거기서 주는 교훈이란 참으로 감동적이지요. 어릴 때 가난해서 겨우겨우 돈을 모아 서점에서 책을 사갖고 나올 때의 기쁨이란 필설로 이루 표현 못할 것이란 얘기인데, 저 역시도 유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50년대 말에 원서를 사려고 돈을 모아 서점에 가서 가까스로 한 권 사갖고 나올 때의 그 기쁨이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것이었지요. 램은 성장한 뒤 여유가 생겨 손쉽게 책을 샀을 때는 그 감격이나 소중한 기쁨 같은 너무나도 귀중한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저도 공감입니다. 그 글은 진귀한 경험과 도덕성에서 우러나는 감동을 주는 것이지요.

이 작품은 제1장과 같은 말없는 벙어리의 사랑과 그 단계를 지난 제2장과도 같은 수다 떠는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사랑이라 하면 열정적인 사랑만을 말하는 듯하나, 여기선 손을 잡는지 안 잡는지는 모르겠으나 말없이 고요히 마주 앉아 있는 그런 사랑을 합니다. 또 선(禪)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종교적 경지에 이른 것으로, 말없는 가운데 말이 통하는 이심전심은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그때의 그 감정이야말로 우리가 아껴야 할 가장 귀한 것이고, 그런 감정이 바로 재와 눈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재란, 눈이란 열정이 가라앉은 차분한 상태이며 그때 느끼는 인생의 어떤 절묘한 감정을 말하는 글입니다. 좋은 글이라기보다는, 속세에선 잘 실현할 수 없지만 우리가 갈구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미학적 정서와 감흥을 주기 때문에 성공적인 글이 된 것입니다.

문체는 시적으로 조용조용 흘러가는 편입니다. 내가 전달하려는 것이 잘 안 될 때 남의 것을 빌려서 하게 되는데, 셸리와 워즈워드의 시를 인용한 것은 원래 영문학자이다 보니 자연스레 나온 것이긴 하겠으나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요.

한 가지, 양주동 선생은 ‘루우씨’를 시골 처녀로 잘못 알고 썼는데, 이는 영국의 자연의 정령 상징입니다. 선생은 ‘나’를 워즈워드와 동일시했으나 시적 화자가 시인 자신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변은 활활 불이 타오르는 정염의 이미지인데 반해 화롯불의 재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에서 교감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맞지만, 아무튼 잘못 해석하여 끌어들인 것입니다. 또 인용하더라도 자신의 언어로써 글을 맺어야지 남의 시로 끝맺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사회 : 지정토론자들의 견해와 다른 견해나 아직 짚어내지 못한 부분에 대해 객석에서 말씀하실 분은 안 계십니까?

유경환 : 양주동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흑백영화 ‘마부’의 주인공 김승호 씨와 똑같다는 인상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의 ‘가슴이 저윽이 설렘을 느낀다’는 대목에서는 ‘아, 마부 같은 이미지의 외양과는 관계없이 내면은 이토록 섬세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글이란 이다지도 묘하고 황홀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선생은 워낙 박학다식하고 다재다능하여 40년대 50년대에 ‘걸어 다니는 사전’이라는 명성을 누렸고, 우리는 그분의 강의를 들으러 몰려다니곤 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니 그때의 감회가 살아납니다. 하나, 이 글 속엔 자신의 경험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의 첫사랑은…’ 하고 시작하여 ‘궐녀는… 그 침착한 품위를 잃지 않는다’고 한 둘째 단락만 필자 자신의 이야기이고, 나머지는 조각보를 만들 듯이 뜯어다 맞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입니다. 수필이 독립된 위상을 지닌 문학 장르로 대접받기 이전에는 이런 재미난 잡기나 토막 이야기로도 통했겠으나, 오늘날 문학작품으로 대접받으려면 완성도 높은 작품성을 지녀야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선생은 저와 동향이고 제가 태어나던 해에 이 글을 썼는데, 7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과거와 같은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문학도 진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사회 : 제목처럼 겨울밤의 이성간의 노변정담이 그 시대에는 상당히 유행했고 어떤 면에서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듯합니다. 세 분 토론자들께서도 이처럼 사랑은 은밀하고 포근한 분위기 속에서 열정적이기보다는 화롯불을 쬐듯 차분히 이심전심으로 나누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글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하는군요.

허세욱 : 나는 이 글은 사랑의 무위성을 얘기하는 게 아닐까, 그 무위성의 상징으로 설야와 노변을 끌어들인 게 아닐까 하고 봅니다. 무위란 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선’이란 말로 이를 강력하게 암시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염정임 : 저도 이 수필의 주제는 사랑이되 사랑의 덧없음을 말한 것이라고 봅니다. 눈은 금방 녹고, 모래 위에 쓴 글은 파도에 휩쓸리며, 재는 모든 것이 타고 난 뒤에 남는 것이지요. 작가가 의식하고 쓴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강경애와의 사랑도 지나고 보니 덧없는 것이었기에 이런 글을 쓴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 : 선생은 어느 글에선가 ‘사랑은 도깨비불이다’라고 쓴 바 있습니다. 관념 속에서는 존재하나 실체는 없는 허상이라는 거지요. 강경애와의 사랑도 1년밖에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바닷가의 모래알이나 화로의 재처럼 무위로 끝났지요.

공덕룡 : 라디오에 나와 대담도 많이 하면서 허풍과 자기 자랑이 많다고 알려진 분이나, 이 글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정진권 : ‘사랑은 선( )禪과 같이 침착하고 태연하고 유유(悠悠)해야 할 것’이라고 했으나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겨울에 할 것이다’는 첫 문장도 역시 찬성하지 않습니다. 땡볕이면 어떻고 가을이면 어떻습니까. 1930년대라면 순애보 시절인데, 여기 언급된 상상이나 사건에 실감이 안 가는 것은 별로 개연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밤에 궐녀가 찾아온다? 지금도 잘 안하는 일인데, 아마 이런 사랑을 꿈꾼 것일 터이지요.(웃음) 눈이 한 자가 쌓이려면 밤새도록 내렸어야 할 텐데, 그럼 눈이 언제부터 내렸을까. 앞서 허구적이란 말도 나왔지만, 허구의 생명은 개연성인데 여긴 그게 없는 겁니다. 화로의 재 위에 셸리의 시를 끄적거린다는 말도 그렇고, 또 ‘설야(雪夜)를 잠깐 지나 설조(雪朝)에 이르고야 말 것이니’라고 했는데, 당시로선 이는 꿈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상하기 힘든 정황이지요. ‘셸리의 안타까운 good night의 정경(情景)이 하필 설야(雪夜) 노변(爐邊)이었는지는 모른다’라고 했으나, 저는 아무리 읽어봐도 이 시에서 노변이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문체는 당시로는 새롭고 사랑의 모습도 상당히 시대를 앞서가고 있지만, 실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유혜자 : 저는 양주동 선생님께 직접 배웠는데, 사랑에 관한 수필을 토론하면서 동서고금의 문학을 종횡무진하시던 강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정읍사’를 배울 때 선생님은 ‘달하 노피곰 도다샤…’의 ‘하’는 존칭호격조사로 연애편지를 쓸 때 상대를 ‘애인하’로 높여 부르면 다음 번 만날 때 대우가 달리질거라든가,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라고 읊은 황진이를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멋진 여성으로 친다고 말했으며, ‘가시리’의 결구 ‘가시난 닷 도셔 오쇼셔’의 ‘닷’을 현대시에서도 볼 수 없는 백미라고 감탄하시던 생각이 납니다. 이 수필의 내용도 연애는 했지만 실제 경험담이라기보다는 강의하듯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당신 나름의 이상적인 연애론을 써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회 : 그럼, 이제 문장의 구성과 문체 얘기를 좀 나눠주시지요.

김형진 : 구성이 짜맞춘 듯한 느낌이 강하여 제겐 감동이 덜했습니다. 문장은 매우 뛰어난 대목이 더러 있습니다. 둘째 단락의 그녀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그러나 시계는 죽어도 쳐다보지 않기로 한다… 노래를 한두 절 읊조리고 있노란즉…’ 이 부분의 간접적인 심리묘사는 오늘날에도 뛰어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면, 셋째 단락의 ‘우리 사이에 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새로운 사실이거나 새로운교양(敎養)임을 요한다’라는 부분은 주제와는 동떨어진, 그냥 그럴싸한 말이라는 느낌입니다.

이태동 : 문체는 주제를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하겠는데, 주제가 정적이라 문장도 상당히 정적입니다. 단문에 속삭임처럼 이어지는 문장을 쓴 것은 주제를 염두에 둔 것이지요. 또 화로의 재를 바닷가 모래에 비유하는 등, 은유를 잘 구사했습니다. 둘째 단락의 ‘수묵(水墨)빛 난초’도 절제와 좌선의 이미지를 불러일으켜, 확 들어오지는 않는 대신 독자에게 차분히 스며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허세욱 : 전반부는 ‘사랑은 눈 오는 밤에’란 주제를 설정해 놓고 상상을 피력한 것인데, 너무 길다는 느낌입니다. 체험적 서사가 적어 구체성이 떨어지고 감동도 적었습니다. 후반부는 무언의 사랑과 지껄이는 사랑의 두 가지 전형에 대한 논증을 벌이고 있어요. 또 ‘굿나잇’과 ‘굿모닝’을 대비한 부분은 상당히 논증적인 간결성을 보여주지요. 그러나 예시로 글을 마무리함으로써 힘을 빼버려 효과가 반감되어버렸습니다.

홍혜랑 : ‘문학도 진화한다’고 하신 유경환 선생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양주동 선생님과 저는 햇수로 따져보면 1세대가 차이 나는데, 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거든요. 문학도 진화했고 사랑의 기법도 진화한 게 아닐까 싶은 거지요. 체험적 서사가 아니더라도 함께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 못하여 아쉬웠습니다.

염정임 : 시를 인용한 것이 오히려 효과를 반감시켰다는 지적에는 공감합니다. 워즈워드의 시는 프랑스에서 영국을 그리면서 쓴 시라는데, 여기서 루우씨는 실존한 여성일 수도 있고, 이태동 선생께서도 언급하셨듯이 영국의 자연을 상징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전반부의 문체와 분위기는 퍽 좋으나, 화로와 영국풍의 노변을 무리하게 줄긋기한 부분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허세욱 : ‘영국식 노변’이란 게 무슨 특수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이태동 : 그냥 벽난로를 말하는데, 그 노변 정경은 아주 아늑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정도지요. 아까 문학이 반드시 진화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도 나왔는데, 현대문학이 절대로 셰익스피어를 못 따라가지요. 또 개연성이 없다고들 하셨는데, 그건 이대로 받아들여야지요. 우리 입맛에 다소 안 맞고 우리 경험과 좀 동떨어지긴 하지만, 이렇게 낭만적인 세팅에서의 연애를 희구하는 정서는 공감할 만하다고 봅니다.

이경은 : 속도지상주의를 달리는 오늘날엔 연애도 훨씬 자극적이고 얼마나 짧은 기간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가를 자랑하는 듯한 풍조가 되어버렸지요. 그에 비해 이 글은 불과 사랑의 이미지를 겹쳐가면서 옛날식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주는 작품으로 읽혀 좋았습니다. 그런데 양주동 선생의 실생활에서의 연애 모습은 이 글에 나타난 것과는 달랐다는 말씀들을 하시네요. 그렇다면 이 글도 작가의 실제 체험이라기보다는 이런 사랑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는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보겠는데, 글과 사람의 괴리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집니다.

이태동 : 문학은 현실이 아닙니다. 체험을 승화시킨 결과물이긴 하겠지만, 상상력으로 빚어내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 식의 사랑 얘기라면 굳이 모여 앉아 읽을 필요도 없겠지요.

고봉진 : 저는 좋은 작품으로 읽었습니다. 뒤의 시 인용 부분도 아쉬운 대로 적절하다고 봅니다. 체험이냐 아니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 부분은 둘째 단락에서 일단 끝났고, 곧이어 있을 법한 연애의 한 장면을 연결시킨 것으로 저는 읽었습니다. 좋은 글이란 일단 잘 읽혀야 한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이 글은 상당히 잘 읽히는 수필입니다. 개연성 없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체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고 봅니다. 앞서 정진권 선생께서 재 위에 셸리의 시를 어찌 다 썼을까라며 의문을 제기하셨으나, 전문이 아니라 ‘Good Night’이란 말을 썼고, 그러다 보니 같은 제목의 시가 생각나서 인용하게 된 것이지요. 전 지금도 낡지 않은 느낌을 주는 좋은 수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시헌 : ‘노변잡기’라는 부제를 붙였지만, 이는 겸손일 뿐 전혀 잡기가 아닙니다. 문장이 매우 뛰어납니다. 묘사가 별로 없고 설명이 좀 많긴 하지만, 때로는 관념적이면서도 거침없이 종횡무진하는, 술술 잘 읽히는 명문장입니다. 문장 자체만으로 문학이 된 작품이라고 봅니다.

최순희 : 저는 ‘재’나 ‘좌선’의 이미지 때문인지 자꾸 무위 혹은 덧없는 사랑이란 말이 나와서 불만입니다. 설야 노변 정경은 제가 보기엔 사랑하는 두 사람이 굳이 언어를 빌리지 않고도 완벽한 소통과 교감을 이룬 장면으로만 읽히는데요? 또 개연성을 의심하나, 작가는 둘째 단락에서 ‘나의 첫사랑은…’이란 말로 실제 있었던 일임을 밝히고 있고요.

허세욱 : ‘무위’라는 말 때문에 오해가 빚어진 듯한데, 이의 정의는 ‘아무것도 안 한 듯하나 아무것도 안 한 것이 아닌(無爲而無不爲)’ 상태를 말합니다.

 

사회 : 무애 양주동 선생은 박학다식과 재승박덕이란 평판을 함께 받은 당대의 대표적 국문학자로, 그의 수필은 자기를 진솔하게 드러내어 생동감과 재미가 있는 한편 현학적 지식과 재치가 앞서서 사색적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 합평한 ‘사랑은 눈 오는 밤에’는 1923년 동경에서 귀국한 후 어려서 결혼한 본처와 헤어지고 강경애와 연애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누님 집에 며칠 묵었는데, 그때 찾아온 그녀와 만나는 장면이지요. 끝으로 명예회장님께 총평을 부탁드립니다.

김태길 : 총평이랄 것은 없고 사족을 붙이자면, 국보·천재라는 명성에 비하자면 그것을 썩 잘 살리는 글은 아닌 듯합니다. 유경환 선생 말처럼 오늘날의 수필 수준이 그때보다 그만큼 높아진 탓이 클 것입니다.

 

사회 : 이것으로 합평회를 마치겠습니다. 열띤 토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