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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평>

 

상형문자(象形文字)

 

                                                                                                박장원

청년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유럽이 원시적 수렵시대일 때 사막벌판에 통일왕국을 이루고 찬란한 문명을 구가했던 애굽으로 향한다. 나폴레옹은 비록 그 전쟁에서 패하지만 로제타스톤을 세계에 소개하니, 18세기 말 프랑스 군대는 알렉산드리아 동쪽 나일강 어구 로제타에서 널브러진 돌을 모아 요새를 쌓다가 단단하고 결이 고운 검은 현무암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만난 것이다. 이 문자는 천재 언어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해독되고, 이 신성문자(神聖文字)를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라 부른다.

19세기 말 청나라 금석학자 유악(劉顎)은 한약방에 약을 지으러 갔다가, 조제된 용골(龍骨) 부스러기에 이상한 문자가 새겨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는 북경 시내 한약방을 돌아다니며 뼈를 수거하여 판독한 결과 중국의 고대문자임을 확인한다. 잽싼 골동품상들은 황하유역의 상나라 마지막 수도였던 소둔(小屯)마을로 모여들지만, 이미 커다란 흙무덤에서 몇백 년에 걸쳐 가난한 농민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용의 뼈라며 헐값에 내다 팔았던 것이다. 이 상형문자를 갑골문(甲骨文)이라 부른다.

그 돌은 신들의 암호로 박물관에 모셔지고, 거북 껍질이나 소 뼈에 그려진 다양한 형상은 면면이 이어진다.

사물을 본떠 그 사물이나 그것에 관련 있는 관념을 나타낸 추상에 가까운 상형문자는 사물의 형상이 고도로 집약된 이미지다.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를 파악하려면 철저한 분석과 과학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세사의 무수한 꼴이 어떤 계기로 형이상인 심상의 스크린을 통해 창조적 상상력으로 인화된 것이 에세이다. 분방자재한 허구가 용인되고 조장되는 소설적 상상력과는 달리, 사실 개념에 근거하여 상상력에 의해 미적 형상화로 수필은 완성되는 것이다.

상형문자(象形文字)의 조어가 심장하다.

상(象)에는 ‘꼴’과 ‘코끼리’가 오버랩된다. ‘꼴’인 사상(事象)은 구체적 사실적인 개념이고, ‘코끼리’라는 상상(想象)은 추상적 상징적인 의미이다. 나일강의 상형문자는 이러한 의식과 지각을 거룩하게 여겨 일부 계층으로 제한하였지만, 황하유역의 상형문자는 사실개념에다가 상상력을 가미시켜 인류적 공감대를 확보하였다. 요컨대 선험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의 인간이, 눈앞에 드러난 구체적 사실적 세계에 대해 과학적 창조적 상상을 통해 미적 형상화를 드러낸 결과의 표의문자인 셈이다.

에세이는 ‘꼴’과 ‘코끼리’가 상존하는 사실적이면서도 과학적 상상력의 문학이다. 실재하는 사실적 요소가 산문의 본원적 전통을 고수하는 꼴이라면, 코끼리라는 자유로운 상징적 창조는 수필의 탄력적인 조건을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2

 

불씨와 갑골문

 

변해명의 ‘비행운(飛行雲)이 지워진 빈 자리’에는 첫사랑의 불씨가 작렬한다.

소박한 질화로 불돌 밑에 꼭꼭 눌러 묻어두고 누가 훔쳐갈까 봐 불안과 기쁨을 교차시킨 이루지 못한 연가가 이제는 심중에서 허공까지 편안하게 펼쳐진다. 불씨를 외할아버지는 ‘조상의 넋’이라 여겨 대를 잇듯 엄숙히 지키고, 손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가슴에 불덩이’를 장작삼아 태우려다가 젖은 짚단 사르듯 사위어가는 아픔으로 맺는다. 긴긴 겨울밤 눈밭에 서서 추위도 무서움도 잊으며 그의 창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홀로 피고 지는 동백꽃이 되었다는 그의 슬픔이지만, 가슴 속에서는 아직도 너울거리는 불꽃의 정감이다. 그 화염은 부시로 몇 번인가 부싯돌을 때려 부싯깃에 옮겨 붙는 것이 아니다. 조종사가 된 그 남자는 사랑의 불씨를 아름다운 시로 하늘에 남기고 사라지니, 구름 한 조각 그리움으로 피워올랐다가 바람이듯 지워져간다.

 

‘비행기는 이미 하늘에서 멀리 사라졌는데 비행기가 날며 그려놓은 비행운은 푸른 하늘에 선명히 남아 비발디의 선율처럼 감미로운 여운의 꽃떨기로 다가왔어요. 바라보고 있으면 자꾸 가슴이 설레었지요. 너무 아름답고 너무 눈이 부셔요. 그 아름다움이 이내 사라지면 슬퍼질까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날, 비행기가 지나간 빈 하늘에 만들어 놓고 간 비행운을 보면서 옛날의 내 모습으로 서 있는 나를 발견했지요. 질화로에 꺼진 불씨를 찾고 있는 내가 문득 놀랍기도 했지만, 그보다 꺼진 불씨가 어느 불돌 밑에 숨어 있기라도 하듯.’

 

비행운이 지워진 빈 하늘에는 저 심연에서 눌리고 눌리다가 사위어간 환상적인 불꽃이 상형문자로 다가온다. 선험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의 인간이, 구체적 사실적 세계에 대해 창조적 상상력을 통해 미적 형상화를 드러낸 사랑의 표의문자. 불돌 밑에 숨을 못 쉬고 눌려 있던 불씨는 사랑의 사상이 되고 심상을 통해 번지던 불꽃은 푸른 하늘에 선명히 남은 비행운으로 형상화된다. 추운 겨울밤 눈밭에서 그 남자네 창의 불빛을 오돌오돌 떨면서 바라만 보다가 열정을 다스리며 애틋한 불꽃을 꺼버리는 체험 고백이 자못 신비롭다.

양산과 히에로글리프

 

서숙의 ‘어느 여인의 섬’은 어느 지독한 사랑의 인사이다.

해 뜨는 바닷가에서 태어나 수평선 너머에 있을 푸른 섬의 주인이 되려다가 해가 지는 서해의 가볍게 떠다니는 섬을 영원한 잠자리로 만든다는 어느 친척의 애달픈 이야기가 담담하기까지 하다. 섬이 없는 도시에서 여상을 졸업하고 취직하여 쥐꼬리만한 봉급을 떼어 작은 방을 얻고 높은 상사가 건네준 까만 직육면체의 황금빛 도쿄 타워처럼 작은 손아귀에 행복이 꼭 잡히는 듯하였지만, 시나브로 바람이라는 언어들이 빛을 잃기 시작하자 인천에서 배를 타는 모진 여행으로 모두에게 짧은 안녕을 고한다. 온통 달구어진 공기 속에 어른거리는 햇빛을 전신으로 용감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꽃무늬 화사한 양산으로 자신의 좁은 공간을 설정한 ‘부디 안녕히’라는 삶에 대한 체념이 섬뜩하다.

 

‘스치듯 찾아온 한 가닥 사랑에의 기대가 나를 더욱 깊이 절망하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력감에 빠져들수록 마음 속의 섬이 나를 불렀습니다. 어서 오라고 말입니다. 해가 뜨던 동해와 달리 해가 지는 서해에는 섬이 참 많더군요. 이곳의 섬들은 바다 밑에서 솟아났다기보다는 가볍게 떠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스물다섯 푸른 청춘을 접어 어디론가 떠나기에 더없이 알맞은 곳으로 생각되었습니다.’

 

한 청춘의 냉소를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리고 담담함과 허무감으로 드러내고, 소설적인 상상력을 통해 서해에 가볍게 떠 있는 어느 여인의 섬을 꿈꾸듯이 묘사한다. 천연스런 감정이입으로 ‘이제 싫증이 나는군요. 시시해요’라는 관객 없는 혼자만의 연극……. 급기야 주인공과 관객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제발 그러지 말라며 소매를 잡아끄는 흡인력을 촉발시킨다. 꽃무늬 화사한 양산 아래의 치자색 모슬린 원피스 자취는 마치 로제타스톤의 암호처럼 여겨지지만, 사랑과 이해로 핏줄의 슬픈 비언어극(Nonverbal performance)을 해독하려 한 그가 은근하다.

 

3

 

2005년 <계간 수필> 봄호에는 ‘죽음’에 관한 주제가 적지 않다. 잔인한 계절을 알리는 서곡인지는 몰라도, 삶의 종결에 대한 부단한 천착이다.

꽃이 먼저 피든 잎이 나중에 나든 새로운 계절은 이미 시작되었다. 생명의 자연은 견고한 몸짓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단련시키니, 설렘과 버거움의 순환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엘리엇은 인생의 엄숙한 슬픈 시간의 출발을 바로 4월이라 한 것일까.

지금도 우리 곁을 무심히 지나치는 형상과 사물들이 있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심상에 맺혀지고, 또 다른 모습으로의 분출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미적 형상화로 우뚝 창조해 내는 것이 문학의 즐거움이다. 마치 상형문자가 함축을 얻듯이 말이다.

 

 

<수필문학>과 <계간 수필>로 등단(2001년). 수필평론가.

수필집 『양수리』, 수필평론집 『코끼리 이야기』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