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

 

                                                                                              김수봉

‘이 산 저 산 꽃은 피니 정녕코 봄이로구나.’

이렇게 시작되는 ‘사철가’는 단가의 일종이다. 판소리의 준비 단계인 이 단가는 허두라고도 한다는데, 첫머리가 중모리 가락으로 들어간다. 앞 대목은 산천의 봄기운이 무르익어 사람의 가슴 속으로도 파고드는 정경이다.

인간의 한평생을 사계절에 빗대어 부른 이 사철가는 삶의 비애까지도 해학적으로 눙쳐서 신명을 돋우는 소리다. 그래서 그 끝은 마침내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로 맺음을 한다.

‘거드렁거리다’는 사전대로라면 틀린 말이다. ‘거드럭거리다’와 ‘거들먹거리다’가 표준말로 돼 있지만, 판소리 가락의 흥에 맞게 창자들이 변형시킨 전라도 말이다. ‘거드럭’과 ‘거들먹’이 다 함께 신이 나서 하는 짓거리지만 경망스럽고 도도하게 구는 일면도 말해 준다. 그래서 경망스러움은 버릇없음이 보이고 도도함은 얄미움까지 생겨나게 한다.

그러나 ‘거드렁거림’에는 경망이나 도도함이 없다. 아무리 까불어도 밉지 않고 구성짐이 묻어난다. 그저 신명일 뿐이다. 까불어도 까불어도 날아갈 검부러기가 없이 까부르는 키 안에 오롯이 알곡만 남아 있는 것처럼.

한 마디 말이 약간의 변형을 거치면서 피워내는 뉘앙스는 오묘하다.

전라도 말에서의 이응(ㅇ) 음은 신비할 만큼 정감을 담는다. 말끝에 ‘~잉’을 붙임으로써 생겨나는 정감을 보라. ‘갑니다’가 단순한 서술인데 비해, ‘갑니다잉’ 하면 다짐과 요청과 절심함이 강조된다. 그래서 판소리는 전라도 말로라야 제 맛을 낸다고 한다. 이것은 표준어의 문제가 아니라 표준어 이전, 소리말의 소중함을 지키는 일이다. 판소리는 아직도 전라도말 그대로 전수되어지고 있지 않던가.

전라도에는 어느 지방보다도 풍물패, 걸립패들이 많았다. 그들이 판을 벌이는 자리는 어디서나 신명 그것이었다. 줄타기를 하는 ‘어름’이든, 대접을 돌리는 ‘버나’든, ‘덜미’라고 하는 꼭두각시놀음이든.

징 소리, 북장구 소리, 꽹과리 소리에 따라 고개를 꺼떡거리고 어깨짓 발걸음이 모두 흥청거림으로 들먹인다. 거드렁거림 그것이다.

이 순간만은 그들에게서 삶의 고뇌가 묻어나지 않는다.

이런 광경을 두고 ‘참깨방정 들깨방정 다 떤다’라는 속담도 생겨났으리라.

상대방이 경망스럽고 얄미워도, 윗사람이 원망스러워도 우스꽝스런 말과 동작으로 민망하지 않게 은근히 타일러주는 효과를 내는 것이 참깨 같은 해학이다. 해학은 상대에게 무엇을 맺히게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에 맺힌 한을 풀어주는 힘이 있다.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는 임방울 명창의 소리에서도, 송흥록의 소리에서도 자주 나온다. 그런데 그 ‘~놀아보세’의 기막힌 말맛이 사람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신명과 신바람 속으로 아무나 끌어들이는 힘이다. 준비도 필요 없고 치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어깨춤을 추면서, 다리도 강동거리면서 끼어들면 그만이다. 그래서 제 나름의 거드렁거림을 맘껏 부려도 좋다.

 

판소리가 생겨난 지 4백 년이 넘어가는 이 시대, 세상이 무섭게 변하고 있다고 한다. 변화의 시류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소외된 구경꾼이 되고 만다. 어깨춤 하나로는 끼어들 마당이 없다.

모든 것이 신속주의요 사이버 공간의 세상이라니 준비 없고 치장할 재력이 없으면 또 하나의 소외집단일 수밖에 없다.

이벤트라는 것이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다. 억지 신명을 내려고 벌이고 또 벌이는 이벤트들이지만 대개는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다.

다 함께 얼굴 마주보며 서로 어깨 겯고 하나 되어 흥청댈 수 있는 놀이판이 자꾸만 좁아지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견제하는, 전투자세로 치닫기만 하는 오늘의 세상에서는…….

 

<월간 문학>으로 등단. 광주광역시문학상,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전라도 말씨로』, 『그 날의 기적 소리』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