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팔자(八字)

 

                                                                                            안인찬

농사짓는 집 아이로서 가장 기뻤던 때는 아버지가 소를 사 오는 날과 땅을 산 날이었다. 둘 다 재산이 늘어나는 일이었으므로 그만큼 부자가 된다는 것이 기뻤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아이에게는 소를 사 오는 날이 한결 더 기뻤다. 땅을 사면 더 큰 부자가 되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은 어른들끼리 문서로 한 거래였고 어린애가 실감을 느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를 사 오면 우선 텅 비었던 외양간에 주인이 들어서서 허전함을 없애주었다. 목에 방울이라도 달아놓으면 목을 흔들 때마다 딸랑거리는 소리가 식구 하나가 늘어난 것만큼이나 집안을 안정시켰다. 그것 말고도 어린애로서는 앞으로 소 고삐를 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닐 일을 생각하면 신이 나는 일이었다.

소를 사 오는 날, 사실은 온 집안이 잔치 분위기로 들떴다. 아버지가 소를 끌고 집안에 들어서시면 어머니가 얼른 행주를 들고 나오시어 소의 입술을 닦아주셨다. 그래야 한집 식구로서 입맛이 동화되어 먹성이 좋아진다는 믿음에서였다. 그런 다음에야 외양간에 들여 매고 부엌에서 나온 개숫물에 쌀겨를 풀어 마른 목을 축이게 하였다. 삼십 리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걸어왔으니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 시원스럽게 물을 마시는 소를 바라보면서 식구들은 얼굴이 순해 보인다느니 힘을 잘 쓰게 생겼다느니 자기 나름의 관상풀이에 신이 났다.

이렇게 소가 한식구가 되고 나면 그를 거두고 보살피는 일 또한 결코 사람 하나를 거두는 일보다 가볍지 않았다. 우선 사람들은 한 방에 서넛이 함께 거처하면서도 소에게는 외양간이라는 널찍한 특실을 주었다. 방만 주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깔짚을 갈아주고 수시로 배설물을 치워주고 일주일에 한 차례 정도는 대청소도 해 주었다. 그 일이 만만한 일이 아니어서 아버지의 몫이었다. 먹이는 일 또한 간단하지 않았다. 여름에는 낮에 풀을 뜯기고 저녁에는 꼴을 베어다 밤새도록 먹여야 되었다. 그러니까 여름철 오후에는 풀 뜯기는 사람과 꼴 베는 사람 이렇게 두 식구는 소를 먹이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겨울철의 소 먹이는 일은 더욱 복잡하였다. 아침과 저녁에는 여물을 삶아서 뜨거운 쇠죽을 먹여야 하니까 그것이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쇠죽의 양이 서너 동이 되다 보니 그것을 끓이는 데 연료가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빼앗겼다. 아침에 누군가 쇠죽을 끓이고 뜨끈한 화롯불이 방안에 들어와야 다른 식구들은 일어났다. 저녁 역시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저녁밥을 짓기 전에 쇠죽을 끓이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사람들보다도 소의 식사시간이 빨라서 순서로만 보면 소가 집안에서 가장 어른 대접을 받았던 셈이다. 실제로 소를 한번 빌려다 부리면 장정 품 둘로 갚아야 되었으니 경제적으로도 사람 이상의 평가를 받았다 할 수 있다.

소는 논과 밭을 갈고 다듬는 일에서 짐을 나르는 일에 이르기까지 사람 몇 몫을 해냈다. 보리농사를 지을 때는 보리방아를 찧기 위하여 연자방아 돌리는 일까지 맡았으니 농가에 없어서는 안 될 상머슴 식구였다. 게다가 암소는 황소와 달리 순할 뿐만 아니라 송아지를 낳아주어 경제적인 도움까지 주었다. 당연히 농가마다 튼실한 암소 한 마리 기르는 것을 가계의 목표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소 한 마리를 갖게 되면 농가로서 기틀이 잡혀가는 대견스러운 일로 여겼다. 어쩌다 급한 일로 기르던 소를 팔게 되면 그것을 위기로 여겨 원상회복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토록 농가에서 소가 차지하는 위치가 확고하다 보니 평상시의 대우도 소홀할 수가 없었다. 식구들이 일터에 나갈 때는 언제나 소를 앞세웠다. 일터에서 식구들이 일을 하는 동안 소는 싱싱한 풀이 우거진 곳에 매어놓아 한가롭게 풀을 뜯겼다. 그것도 한나절에 두어 차례 옮겨주어 지루하지 않게 좋은 풀을 뜯도록 하였다. 저녁에는 마당가에 매어놓고 식구들이 멍석 위에서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들으면서 모깃불도 함께 쐬도록 하였다. 겨울에는 덕석을 만들어 입히고, 외양간 안에서 춥고 답답할 세라 햇볕만 나면 양지쪽에 내다 매고 싸리비로 털을 쓸어주며 정을 쏟았다.

소가 한식구로서의 대우를 제대로 받았다는 증거는 새끼를 낳았을 때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소와 한식구처럼 살던 시절, 사람이 애기를 낳으면 대문에 금줄이라는 것을 내어 걸었다. 애기가 아들인 경우에는 새끼줄에 숯과 고추를 끼우고 딸인 경우에는 고추 대신 솔잎을 끼워 걸어두어 부정을 타지 않도록 하려는 방편이었다. 그것이 못된 기운의 침입을 막아주는 힘이 실제로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가족 아닌 사람들의 출입을 막아 애기와 산모를 보호하려는 지혜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런 금줄을 소가 새끼를 낳았을 때에도 내어 걸었다. 애기를 낳았을 때와 다른 점은 새끼가 암놈이건 수놈이건 구분 없이 솔잎만 꽂아 거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과 한식구로서 생활하다 보니 고락도 같이 하게 되었다. 농사일이 한창 바쁜 철에는 쟁기질에 지쳐 목이 붓거나 길마질로 등에 상처가 생기는 일이 있었다. 그럴 때는 소와 함께 잠을 설치며 식구들 모두가 안타까워하였다. 이렇게 10여 년쯤 함께 살면 사람과 소는 정이 깊어져 집안의 애사에 소가 눈물을 흘릴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농사일을 하기 어려울 만큼 늙으면 고기소로 팔려가 살은 물론 뼈까지 사람들의 먹이가 되어 소의 일생은 끝나게 되었다.

저토록 가까웠던 사람과 소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농촌에 경운기가 들어오고부터였다. 경운기에게 일을 빼앗긴 소는 고기소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었다. 비육우라는 이름으로 한 집에서 여러 마리씩 기르게 되자 사료를 먹이는 방법도 달라졌다. 잠자리도 특실에서 아예 별채로 옮기게 되었다. 먹고 살만 찌면 되니까 옛날처럼 거추장스러운 코뚜레를 꿰어 고삐에 매어 둘 필요도 없어졌다. 고달픈 일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운신이 한결 자유로워진 것이다.

한때 농촌 여성들이 자기들의 고달픈 삶을 빗대서 암소 같은 삶이라고 푸념한 적이 있었다. 애 낳고 뼈빠지게 일만 하다 보면 늙게 되는 것이 닮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토록 고달팠던 소의 삶이 짧은 기간 동안에 완전히 역전되었다. 호주제까지 폐지되기에 이르렀으니 농촌 여성들의 삶도 암소의 그것 못지않게 역전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농촌 여성과 암소의 삶이 닮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튼 소가 살을 불리면서 돈을 벌어주니까 농가에 소의 경제적 가치는 여전히 크다. 그러나 온가족이 쓰다듬어주고 식구처럼 보살피며 정을 쏟는 일은 없어졌다. 논밭은커녕 뒷동산에 식구들과 함께 나가 보는 일도 없다. 그저 주는 사료를 삭이느라 언제나 그 큰 눈을 껌벅이며 권태로운 세월을 보낼 뿐이다. 어찌 보면 여유로운 듯, 달리 보면 덤덤한 그 표정을 보면서 팔자 많이 좋아졌다고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멍에 메고 헉헉대며 주인들과 한식구로서 어울려 살던 때보다 소는 과연 더 행복해진 것일까. 궁금하여 직접 물어보아도 정작 소는 대답이 없다.

 

<수필공원>으로 등단. 충북대 농업경제학과 교수.

수필집 『개비다 철학』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