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박용화

그녀는 요사이 열병에 시달린다. 막연히 사랑에 열을 올릴 시기에도 이성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녀다. 어느 날 사랑은 운명처럼 다가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 만나는 순간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충격을 받는 것이 운명적인 사랑이라 믿었다.

그런 그녀가 한 남자를 만났다. 어떤 모임 자리에서였는데,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던 남자의 무관심이 은근히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는 그 남자에게서 운명을 느꼈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 충격은 아니었지만, 전생에 어디선가 만나 봄직한 낯익은 모습이다. 지나고 보면 그 모습은 아버지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를 알면 알수록 익숙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했다. 그 모든 현상을 그녀는 운명이라 이름지었다.

어느 겨울이었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 그녀는 남자와 헤어졌다. 다시는 보지 않을 태세로 냉랭하게 돌아섰지만, 그 후 오랫동안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랑과 증오는 같은 선상에 있는 게 아닐까.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만큼 그를 열렬히 증오했다.

혼자가 된 그녀는 많이 외로웠다. 술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술을 입안으로 틀어넣으면 아픔은 잊혀지고 의식은 느슨해졌다. 모든 것이 하나의 현상으로 보일 뿐,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다.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심각한 그 무엇도 이내 가벼움으로 여겨졌다. 가끔 그녀는 독한 소주를 홀짝거렸다. 과거에 대한 상실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소주잔에 띄운 채 술을 마시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곤 했다. 운명이라 믿었던 사람과의 이별은 꽤 오랫동안 그녀를 침잠시켰다.

무심하게도 시간은 흘러갔다. 혹독한 불면에 시달렸던 그녀는 이른 시각에도 눈꺼풀이 무거워지면 곧장 침대로 갔다. 홀로 된다는 것이 외롭고 쓸쓸하지만, 때로는 자유의 늪에서 해방감에 젖기도 한다. 비가 오는 날 창 밖을 내다보면 잿빛으로 물든 눈에서 뜨거움이 쏟아지기도 하지만, 슬픈 멜로디와 가라앉은 풍경 탓이리라 짐작하고 만다. 사랑과 미움의 세월은 치유하기 힘든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긴긴 터널을 벗어나니 비로소 세상이 보였다. 잃어버린 시간만큼이나 훌쩍 넘어버린 의식 사이로 가끔 스산한 바람이 인다. 하지만 이미 쓰라린 상처에는 딱지가 앉은 듯, 한결 숨쉬기가 편안하다. 그토록 아파 허우적댈 때는 처절하게 혼자였다. 물론 세상은 밖으로 나오라 손짓했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울타리를 더 높이 쳤다.

그녀는 선을 보기 시작했다. 단숨에 신데렐라로 만들어 줄 사람들을 연이어 만났다. 화려한 조건으로 상대는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세월이 조금 흐르고 나니 아픔을 잊기 위해, 혹은 피하려고 어떤 선택을 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가끔은 홀로 겪어낸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참담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4월의 첫날, 왜 5월의 신부가 되고 싶은 걸까. 결혼식 장면을 보면 괜스레 가슴이 부풀어오른다. 머잖아 꼭 그 자리에 설 것만 같다.

‘어떤 드레스가 좋을까? 전통혼례는 어떨까?’

애잔하게 흐르는 연주가 마음을 뒤흔든다.

“내게 있어 사랑은 고지식한 거요!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사랑해야 하니까.”

영화의 주인공이 말했다.

그녀는 요즘 딜레마에 빠졌다.

‘과연 사랑이란 뭘까. 비가 그치면 나타났다 금세 사라지고 마는 무지개는 아닐까. 한순간 가슴을 휘젓다 훅 불어오는 바람에 사라져버리면 어떡하지?’

유혹의 속삭임이 들린다. 이제야 비로소 지고지순한 사랑이 찾아든 것이라고.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운명의 사랑이 찾아왔다고. 아무리 밀쳐내도 밀려나지 않는, 쉽게 달아올라 쉽게 식어버리는 양은 냄비 같지 않고, 질그릇같이 투박하나 그 열기가 오래 이어지는, 노을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슬비가 내리고 있다.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남녀가 마주보고 서 있다. 산성비 운운하며 좀체 비를 맞지 않으려던 그녀가 우산도 없이 비를 맞는다. 그와 함께라면 소나기를 맞아도 좋을 것 같다. 드디어 그녀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걸까.

 

<계간 수필>로 등단(2000년).

시문회 회원.